'탈북 여종업원' 북송 논란.. 떨고있는 3만 탈북자들

김수경 기자 입력 2018. 5. 14. 03:07 수정 2018. 5. 1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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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종업원 북송 논란]
통일부 입장바꿔 북송 여지 남기자 "나도 北 끌려가는 것 아닌가" 불안
남북화해 시점에 '걸림돌' 대우받아
"통일되면 남북양쪽서 총 맞을것" 탈북자에 퍼붓는 악담
"너희 엄마 때문에 통일이 안돼" 탈북자 자녀들 학교서 따돌림
남북회담 뒤 안보강연 일도 '뚝'..
대북전단 뿌리면 "통일훼방놓나" "北은 그대론데 南만 변해" 한탄

지난 10일 한 방송이 2년 전 중국 저장성 북한 식당에서 집단 탈출한 여종업원들의 기획 탈북 의혹을 제기했다. 이튿날 통일부는 "사실관계 확인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북송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동안 "자유의사로 탈북했다"고 해 온 정부의 입장 변화는 남한 탈북자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11일 탈북자 김태희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2분 30초짜리 동영상을 올렸다.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1997년 탈북해 남한에 정착했다. 김씨는 동영상에서 "여종업원들에 대해 벌써 몇 번째 북송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나라고 보내지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절대로 스스로 북한으로 넘어갈 일이 없으며 만약 제가 북한에 끌려가서 자발적인 것처럼 기자회견을 하는 일이 생겼어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니 저에 대한 구출 운동을 해 달라"고 호소했다.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김씨만이 아니다. 2008년 탈북해 세 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 박모씨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로 밤에도 한 시간 이상 연속해서 잠을 자 본 적이 없다"며 "조용히 살아온 나 같은 사람도 한순간에 북으로 다시 끌려갈지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는 현재 3만1500여명. 이들은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탈북자들은 남북 통합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초의 통일 국민'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는 시점에 '통일의 걸림돌'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정부의 무관심, 이웃의 냉대를 느낀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은 탈북자에 대해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탈북자라는 말은 김정은의 입에서 나왔다. "실향민, 탈북자, 연평도 주민 등 언제 북한군 포격이 날아올까 걱정하는 분들도 오늘 우리 만남에 기대하고 있는 걸 봤다"고 했다.


탈북 종업원들의 북송 가능성이 다른 탈북자들에겐 남의 일이 아니다. 탈북 종업원 가운데 일부가 북한으로 간다면 남은 이들의 북한 내 가족 안전은 장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남한으로 납치됐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 탈북자는 "북한 가족 상황이 탈북자에겐 가장 중요하다"며 "만약 남한에 남은 종업원의 북한 가족들에 대한 집단 보복이 시행되면, 남한 내 다른 탈북자도 급격히 동요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탈북자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강사로 나서던 안보 강의는 뚝 끊겼다. 탈북자 정모씨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안보 강연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그전엔 한 번에 20만원 정도 강의료를 받고, 일주일에 2~3번 했었다. 최근 예정돼 있던 강의 두 번 중 한 번은 취소됐다. 어렵게 나간 강의는 도중 중단됐다. 한 참석자가 "남북 간 분위기가 좋은데, 웬 의식 교육이냐"고 중단을 요구했고, 강의는 파행됐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강의가 완전 끊길 것에 대비한 자구책이다. 다른 탈북자 강사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안보 강사이던 탈북자 이모씨는 지난달부터 야간에는 편의점에서, 주말에는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안보 강의도 예전엔 주로 북한 실상과 통일에 관한 것이었는데, 최근엔 주최 측이 남북 평화에 대해서만 강의하라고 요구했다"며 "그마저도 이젠 강의 요청이 없다"고 했다.

회사와 학교에서 주변인들이 보내는 시선은 차갑다. 경기도 한 중소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탈북자 강모(44)씨는 남북 정상회담 장면을 회사 동료들과 TV로 지켜봤다. 강씨는 환하게 웃는 김정은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5년 전 북한을 탈출한 그는 김정은의 공포정치를 생생히 기억한다. 강씨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런 강씨를 본 동료들이 "통일되는 게 싫으냐"고 힐난하듯 물었다. 동료들과의 대화는 말싸움으로 번졌다. 한 동료가 "그러니까 탈북자들이 욕먹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몸싸움 직전까지 갔고, 강씨는 결국 팀장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았다. 강씨는 "힘들게 탈북했고 북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동료들에게 말했었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등 돌리는 것 같아 배신감이 든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나고 자란 어린 탈북자 아이들도 차별받는다. 서울에서 남편과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최근 초등학생 자녀 문제로 속이 타들어 간다. 작은 식당엔 같은 학교 학부모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최근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어느 날 아이가 "친구들이 엄마 때문에 통일이 안 된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손님이 줄어든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탈북자라는 것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받는 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내 아이는 남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했다.

서울 한 사립대에선 강의 시간에 한 강사가 "통일되면 탈북자가 설 자리는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강사는 농담처럼 "남북 두 총알에 탈북자가 맞아 죽을 수도…"라고 했다. 강사는 수강생 중에 탈북자 학생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부로 살고 있는 탈북자 박모씨는 잘 다니던 교회에 나가지 못한다. 교인들이 다짜고짜 박씨에게 다가와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 "북한의 실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예 발길을 끊었다. 박씨는 "북한은 그대로인데, 남한만 변했다"고 했다.

탈북자를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엇갈린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종업원 12명을 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청원은 지난 12일에만 10여개 올라왔다. '이들을 절대 보내면 안 된다'는 청원에는 9000명이 동참했다. 김병조 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과 교수는 "남북 관계를 위해서라도 정부가 탈북자들의 동요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남북한 양쪽의 장단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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