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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시 '그날' 쓴 고등학생 11년 만에 입 열다

입력 2018.05.16. 16:26 수정 2018.05.17. 11:46
정민경씨 인터뷰
"고3 때 쓴 시가 10년 넘게 회자돼 감사하고 놀라..
새 정부 진상규명 통해 광주의 진실 꼭 밝혀졌으면"

[한겨레]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시 ‘그날’을 쓴 정민경씨. 정민경씨 제공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정민경(29) 씨는 ‘얼굴 없는 시인’이다. 그가 고등학생 때 쓴 시 ‘그날’은 2007년 제3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 서울 청소년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천재 고교생이 쓴 5·18 시’로 다시 읽히며 화제가 된다.

그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것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그날’이 지난 10년 동안 이름 난 작가의 시 못잖은 유명세를 이어가는 동안 정작 시를 쓴 정 씨의 행보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이 된 정 씨가 여전히 백일장 수상 당시 신분이었던 ‘경기여고 3학년 정민경’으로 소개되는 이유다.

그런 정 씨가 11년 만에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나섰다. 정 씨는 1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5·18과 관련해 10년 넘게 자신의 시가 언급되는 데 대해 “어렸을 때부터 취미 삼아 시를 써왔는데, 여전히 많은 분들이 제 시를 읽고 감상해주셔서 놀랍다”며 “요즘은 친구들이 에스엔에스에 ‘그날’을 올릴 때 제 이름을 태그로 달아 놓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당시 백일장 심사위원이었던 정희성 시인은 ‘그날’에 대해 “‘그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해놓는 놀라운 솜씨”라고 극찬했다. 열아홉 고등학생 시절 정 씨는 어떤 이유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정 씨는 5·18이 일어난 지 9년 뒤인 1989년 광주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살았다. 부모의 고향이 각각 전남 나주와 여수인 점도 시에서 자유자재로 전라도 방언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 씨는 “5·18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가족은 없지만, 아버지 친구분 중에 5·18 때 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아직도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분들이 많다”며 “부모님은 평생 주변에서 5·18 피해자들을 보셨기 때문에 저 역시 자연스럽게 ‘오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고 말했다.

특히 정 씨는 ‘그날’을 쓰는 데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으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을 꼽았다. 그는 “첫 화에 사람이 방 안에서 떨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서부터 상상이 시작돼 ‘그날’을 쓰게 됐다”며 “사학과에 다녔던 네 살 위 친오빠와 역사 관련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도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상을 받은 뒤 ‘그날’의 저작권을 백일장을 주최했던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그날’을 쓴 뒤 한동안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만큼 시의 화자에게 몰입했다”며 “이 시가 제 손을 떠나 5·18 희생자들을 위해 보다 많은 곳에 쓰일 수 있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정 씨가 백일장 수상 이후 꼭 11년 만에야 언론에 자신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수능을 앞둔 고3이었던 정 씨는 자신에게 쏟아진 갑작스러운 관심이 당황스러웠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처지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2007년만 해도 5·18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어요. 가족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되도록 언론과의 접촉은 피했습니다.”

그런데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열아홉 고등학생이었던 정 씨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그는 “시를 발표한 이후 정치적인 이념 때문이었는지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는 교사들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 씨가 쓴 시를 인쇄해 반마다 돌아다니며 “빨간 펜으로 이 시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라”고 말하며 망신을 준 일도 있었다. 교무실에 불려가 “(수상과 관련해) 대학 쉽게 갈 생각을 하고 있다”와 같이 수상 자체를 깎아내리는 말도 들어야 했다. 정 씨는 그 시절에 대해 “학교에서 교사들과 마찰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고,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의 평소 관심과 거리가 먼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정 씨는 대학에서도 인문학회 활동을 하며 지속해서 글을 써왔다. 주변에선 전업 작가를 해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는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기에는 생계를 해결할 자신이 없어” 대학 졸업 뒤 카피라이터로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정 씨는 조만간 회사를 나와 문화 분야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작가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배 곯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현재 정 씨의 꿈이다.

인터뷰를 끝내며 정 씨는 다시 한 번 5·18에 대해 걱정하는 소회를 남겼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5·18을 앞두고 제 시가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오월 광주’와 관련된 문화 콘텐츠가 드물기 때문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근 5·18 진상규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그동안 감춰졌던 광주의 진실이 속 시원히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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