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담배·커피시간 근무서 제외"..52시간 예행연습서 불만 폭발

박대의,강인선 입력 2018.05.21. 17:2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주 52시간' 미리 해보니 워라밸 더 나빠져

◆ 근로시간 단축 후폭풍 ⑤ ◆

대형 금융사에 다니는 박 모 대리(33·여)는 얼마 남지 않은 근로시간 단축 시행이 누구보다 반갑다. 회사 내부적으로 직원들의 잦은 흡연·티타임을 자제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애연가인 부서 상사 김 차장(44·남)이 더 이상 혼자만의 2시간 점심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오전 11시가 지날 무렵이면 흡연을 위해 자리를 나선 후 점심 장소로 직행했던 김 차장도 '자리 비우는 횟수를 줄이고 흡연시간도 한 번에 10분 이상 갖지 말라'는 부장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었다. 박 대리는 "우리 같은 비흡연자나 입사 경력이 짧은 부하 직원들은 한 번 담배 피우러 나가면 '함흥차사'인 상사들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며 "이제 자리를 비워서 전화를 대신 받고 업무를 대신 처리할 일이 없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담배 피우는 시간마저 침해당할 위기에 처한 흡연자들은 '물귀신' 작전에 들어갔다. 김 차장은 "보통 여자들은 화장실 한 번 가면 20~30분씩 쓰는 일이 다반사인데, 기왕 할 거면 그런 시간까지 통제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앞두고 노사(勞社) 갈등이 노노(勞勞) 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흡연이나 커피 마시는 자투리 시간은 물론 점심과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철저히 감독하겠다는 기업들이 나오는 가운데 직군·경력·성별에 따른 노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갈등이 증폭되는 모습이다.

근로시간 단축의 피해는 주로 관리자급 이하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팀장급 이상 관리자들은 부하 직원들의 야근시간이 길어질수록 인사 고과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빨리 퇴근하라'고 엄명을 내리지만 부하 직원이 할당받은 업무량 자체를 줄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대리·사원급 직원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업무량에 치여 '죽기보다 싫은'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임 모씨(26)는 "'막내 직원이 가기 전까지는 집에 안 간다'는 팀장 말에 웃으며 짐을 싸지만 집에 가서 다시 시작될 업무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문서를 외부에 반출할 수 없도록 한 회사 방침은 이럴 때 더 원망스럽다. 그는 "기밀유지 방침에 따라 자료도 외부로 갖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문서를 죄다 새로 만들 수밖에 없다"며 "사실상 업무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정도로 비효율의 연속"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인건비가 비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유통업계에서는 일정 시간이 되면 컴퓨터가 꺼지도록 만드는 'PC오프제'가 시행되고 나서 이를 무력화시키는 '팩(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있다. 팩이 설치된 팀 내 몇 안 되는 컴퓨터는 '마법의 컴퓨터'로 불리며 불가피하게 야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의 구세주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개정 근로기준법 7월 시행을 앞두고 지난달 말부터는 인사팀 직원들이 직접 회사 건물을 돌면서 사무실 불이 꺼졌는지를 계속 단속해 그마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고 전했다.

대형 백화점업체는 근로시간 단축 본격 시행에 앞서 지난달부터 근무시간 시범 적용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제도 변동으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3개월간 유예기간을 두면서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며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시행 1개월 만에 직원들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업무량은 동일한데 근로시간 단축만 전면에 내세우면서 당초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던 직원들의 워라밸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공식 근무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로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8시간이다. 그러나 백화점 운영 특성상 영업시간에 점포 정리가 어렵다 보니 연장근무는 거의 필수다. 하지만 법적 근로시간 단축으로 연장근무 가능 시간이 12시간으로 줄면서 오히려 '무료 봉사' 시간만 늘고 있다. 기존 업무량을 제한된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당은 못 받고 일만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는 상황이다.

윗선에서도 "근무수당 신청을 12시간에 맞추라"는 말만 할 뿐 거의 손놓은 상태다. 특히 시간외 근무를 관리하는 관리자들이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을 우려해 부하 직원들이 신청하는 근무 신청을 반려하면서 직급 간 감정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김씨는 "특정 회사의 문제라기보다 제도 시행 전에 소프트랜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않고, 업종별로 갖고 있는 특성도 고려하지 않은 점이 문제"라며 "급격한 변화 때문에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대의 기자 / 강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