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유와 성찰]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 입력 2018.06.0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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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늘날 자기계발서들은 당신을 위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삶이 힘들죠?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멈춰 서 보세요.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기 전에 잠깐 스치는 게 삶이죠. 마음을 고쳐먹으세요. 내려놓으세요. 집착을 버리세요. 세상 탓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해요. 옳은 것보다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해요.

물론, 이러한 조언도 필요하다. 특히 사랑을 하고 있는데도 사랑이 하고 싶을 때, 밥을 먹는데도 밥이 먹고 싶을 때, 살고 있는데도 살고 싶을 때, 자기계발서의 조언들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상적인 문제의 뿌리는 보통 다른 곳에 있다. “삶이 힘들어”라는 말은 대개 “취직을 하고, 괴롭히는 직장상사가 없고, 빚이 없고, 일주일에 4일만 일하고, 봄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싶어”의 준말이다. 너무 길어서 평소에는 “삶이 힘들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 이에게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위로를 선물하는 것은 욕조가 없는 이에게 입욕제를 선물하는 것과 같다.

정신 승리에만 열중하다 보면, 객관적인 현실이 슬그머니 다가와 백허그를 한다.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바닥난 은행잔액을 바라보세요. 정신 승리를 한다고 해서, 길 잃은 지폐가 방문을 두들기며 여보세요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당신 지갑 속에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라고 하겠어요? 이불 속에서 오늘은 금요일이라고 10번 외쳐도, 이불 밖의 현실은 여전히 월요일이죠. 그렇다면 이제 객관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정부가 애써 집계하고 있는 ‘과학적인’ 통계 수치들을 바라보세요. 인구통계, 실업통계, 출산율 통계, 자살자 통계, 가계부채 통계, 최저임금 통계 등등.

그러나 숫자만 가지고는 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현실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중이므로. 은행은 좀 더 많은 돈을 빌려가라고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것을 발명했다. 이로써 잔액이라는 현실이 재정의되었다. 대학은 재원 확보를 위해 여름학기만 수강해도 동문으로 인정해주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학벌이라는 현실이 재정의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국회가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포함시켰다. 이로써 최저임금이라는 현실이 재정의되었다. 이뿐인가. 인간의 신체 현실도 재정의 중이다. 미국에서는 고혈압 기준을 130/80㎜Hg로 낮췄지만, 대한고혈압학회는 고혈압 기준을 현행대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림대병원 가정의학 연구팀은, 한국 비만 기준과 미국 비만 기준은 같을 수 없으므로, 국내 비만 기준을 상향조정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곧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논쟁을 통해 생명 또한 재정의될 것이다. 생명의 시작은 세포인가, 태아인가, 신생아인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작동해야 살아 있다고 간주할 것인가. 생명의 정의에 따라 인구통계도 달라질 것이다.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숨 가쁜 외교전 속에서도 지속되는 국제결혼과 외국인 노동자 유입은 단일민족이라는 현실도 재구성하고 있다. 남북의 만남은 국가 간의 만남인가, 민족끼리의 만남인가.

이 모든 과정에는 정신 승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이를테면, 고혈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혈압 환자가 될 수도 있다. 현재 1100만명에 달한다는 고혈압 환자의 수와 14조원에 이르는 고혈압에 따른 의료비가 갑자기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정부 예산 규모와 세금 액수도 달라질 것이고, 관련 산업도 새롭게 부침을 거듭할 것이다. 정신 승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수록 사이비 인문학 시장은 성장할 것이고, 약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수록 제약산업이 성장할 것이고, 운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수록 헬스산업이 성장할 것이다.

최저임금이 재정의되고, 민족이 재정의되고, 고혈압이 재정의되고, 비만이 재정의되고, 학벌이 재정의되고, 대학이 재정의되고, 역사가 재정의되고, 마음이 재정의되고, 생명이 재정의되고, 동시에 정신 승리를 위한 자기계발서의 좌판이 흥성하는 2018년 봄 한반도에, 세계 최대의 핵무기 보유국 대통령 트럼프의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You talk about your nuclear capabilities, but ours are so massive and powerful that I pray to God they will never have to be used(핵무기? 우린 더 엄청난 핵무기가 있어. 좋은 말 할 때 자본주의 세계질서 안으로 들어와).” 트럼프는 백허그도 생략하고 말한다.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