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데탕트 역사로 보는 북미정상회담의 기회와 위기

입력 2018.06.11. 11:16 수정 2018.06.1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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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분쟁이 본격화한 데탕트, 미국 외교에 주도권
데탕트 20년만에 소련 붕괴와 중국 부상으로
데탕트는 세력 재편 게임..북미회담은 모두에게 양날의 칼

[한겨레]

냉전질서를 종식하고 사회주의권을 붕괴시킨 미-중-소 데탕트의 주요 두 장면인 1972년 리처드 닉슨-마오쩌둥 미중 정상회담과 1986년 로널드 레이건-미하일 고르바쵸프 미소 정상회담.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미-중-소 데탕트는 결국 냉전질서 해체와 사회주의권 붕괴로 이어졌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냉전 질서를 해체하려는 최후의 데탕트의 시작이다. 이 최후의 데탕트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기회와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편집자

1969년 3월2일 소련과 중국의 동부 국경 우수리강에 있는 전바오섬에서 두 나라 국경수비대가 충돌했다. 충돌은 첫날에 소련군 59명, 중국군 71명이 전사하는 등 21일까지 이어지며 정규전 수준의 무력분쟁으로 비화됐다.

2개월 전 취임한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 중-소 분쟁을 미국 외교에 전례 없는 위기이자 기회로 판단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다가 달러 가치 하락 등 경제력 약화로 유럽 동맹국 등에 대한 장악력이 취약해지는 등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군사력에서 미국을 추월할 기세였고, 제3세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소련은 그 전해인 1968년 체코의 반소 항쟁인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하면서, 사회주의권 국가에 대한 소련의 개입과 종주권을 정당화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했다. 소련이 이 독트린을 중-소 분쟁에 적용해 중국을 다시 과거 스탈린 시대 때처럼 하위 동맹국으로 편입시킨다면 세계의 세력균형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 등 권력투쟁과 심각한 경제난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에게 세계의 세력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전례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소 분쟁은 또 중국과 소련이 미국보다는 서로를 더 두려워 한다는 증거였다. 이는 당시의 냉전 질서로는 상상할 수 없던 반소 미-중 연대라는 세력 구도로 닉슨과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다가왔다. 닉슨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강경 반공 매파였으나, 그에게서 이데올로기란 수단에 불과했다. 자신의 권력과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데올로기나 이상, 가치는 종속물에 불과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닉슨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해에 <포린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10억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 속에서 사는 공간은 이 작은 행성에는 없다”며 엄연한 실체를 가진 중국을 없는 나라처럼 계속 취급할 수 없다는 견해를 일찌감치 보였다. 닉슨의 이런 현실주의 인식은 중-소 분쟁이 발발한 직후 여름 두 가지 비상한 조처로 이어졌다. 당시 미-중의 접촉 창구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채널에서 양쪽이 대립하던 모든 사안을 보류시키는 한편 7월21일 중국 여행 금지 등 대중국 제재를 일방적으로 완화했다.

나흘 뒤인 7월25일에는 닉슨은 대소련 봉쇄 등으로 냉전 질서를 구축한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최대 분수령인 닉슨 독트린을 괌에서 발표했다. 1970년 연두교서로 더 구체화된 닉슨 독트린의 요체는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에게 맡긴다’는 것으로, 사실상 아시아에서 대중국 봉쇄망 해제를 의미했다.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미국의 베트남전 철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71년 7월9일 병환을 이유로 백악관에 출근하지 않은 키신저 보좌관은 파키스탄에 은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날 파키스탄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만나 양국 관계 개선에 합의했다. 키신저가 귀국한 나흘 뒤인 15일 양국은 닉슨이 마오쩌둥 중국 주석의 초청을 받아서 중국을 방문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1972년 2월21일 중국을 방문한 닉슨에게 마오쩌둥은 “작은 문제는 대만이고, 큰 문제는 세계”라고 강조했다. 미-중 화해에서 미국에게 가장 걸림돌인 대만에 대해 중국은 현상을 인정하겠다고 양보한 것이다. 양국 정상의 상하이 공동성명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양쪽은 그런 패권을 수립하려는 어떠한 나라나 국가군의 노력도 반대한다”고 천명해, 소련을 겨냥한 반소 미-중 연대를 사실상 선언했다.

냉전 질서를 허무는 데탕트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중-미의 접근은 미국에게 미-소 관계에서 지렛대를 확보하게 했다. 소련 역시 미국과 전략무기감축 협상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중국과 데탕트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소련은 키신저의 중국 방문 한달 만에 닉슨의 모스크바 방문을 초청했다. 닉슨은 중국을 방문한 지 3개월 만인 1972년 5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는 얄타회담에 참가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미국 대통령의 첫 소련 방문이었다. 미-소가 60년대 중반부터 끌어오던 군축 문제가 이 회담에서 역사적인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조인으로 타결됐다.

미-중 접근으로 허를 찔린 소련은 서쪽의 유럽 국가들과 서둘러 데탕트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헬싱키조약을 낳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개최로 이어졌다. 1969년부터 제안된 유럽안보협력회의에서 소련의 근본 목적은 2차대전 이후 유럽의 국경선 인정, 즉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세력권 인정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미-중이 접근해 동쪽 지역에서 자신을 압박하자, 서쪽에서의 대결을 완화하려고 했다. 서방은 유럽 내 기존 국경선의 불가침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동구권의 인권 및 표현의 자유, 주민 이동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이런 내용을 담아서 1975년 조인된 헬싱키조약은 동구 사회주의권 해체로 가는 씨앗을 뿌렸다. 소련과 동구권에서는 헬싱키조약의 인권 조항을 감시하는 비정부단체들이 생겨나, 이는 동구권 및 소련 반체제 운동의 시작이 됐다. 당장 폴란드에서는 그 다음해인 1976년 동구권 해체의 본격적 출발인 자유노조운동의 맹아가 생겨났다. 윌리엄 하이랜드 당시 백악관 부안보보좌관은 “소련 제국이 금이 가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면, 그건 헬싱키이다”라고 나중에 평했다.

미-중-소 데탕트를 본격화시킨 1969년 중-소 분쟁으로부터 10년 뒤인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소 데탕트는 와해됐고, 미-중은 국교 정상화를 하며 더욱 밀착했다. 곧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하고, 무제한적 군비 확장 노선으로 핵전쟁 위기를 조성하며 소련을 압박했다. 동구권의 이반 및 소련 경제의 악화로 궁지에 몰리던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로 등장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천명하고는 소련식 데탕트를 주도하려 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일방적으로 양보하며 ‘10년 내에 모든 핵무기의 철거’라는 합의를 도출하며, 미-소의 새로운 데탕트를 창출하려 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미국이 ‘스타워즈’라는 전략무기방위구상을 고집함으로써 조인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때부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혼란과 이탈이 격화되면서 소련 체제는 자신이 표방한 개방과 개혁의 희생물이 됐다. 1988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이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소련권 이탈로 이어졌다. 결국 소련은 1991년 12월26일 붕괴되며 지도에서 지워졌다.

데탕트는 현상적으로는 긴장 완화와 화해의 조류였지만, 본질은 새로운 세력 재편 게임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 뒤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 세력 양분 질서를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력 균형 질서를 만들려고 대응한 것이다. 미국이 먼저 선공해서 주도권을 쥐었고, 이는 결국 20여년 뒤 소련과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냉전 질서 종식으로 가는 방아쇠가 됐다.

북-미 정상회담은 약 30여년이나 지체된 한반도 데탕트의 시작이다. 1991년 전후로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한국은 중국 및 소련과 수교했으나, 북한의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는 거부됐다. 이는 북한이 체제 안보를 위해 핵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주요 배경이었고, 한반도를 여전히 냉전 질서의 최후 보루로 남겨뒀다.

한반도 데탕트는 30년이나 지체되면서, 냉전 질서 해체라는 애초의 목적에서 더 나아가 세계 질서에 새로운 위기와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미-중-소 데탕트가 소련 붕괴 및 중국의 부상으로 이어진 뒤 3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미-중 대결이 격화되는 한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 주도 서방 동맹의 심각한 균열이 깊어지고 있다. 미-중 대결의 최대 접점인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의 화해에 성공한다면,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세력 균형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미국이 선공하는 모양새인 이 데탕트가 1970년대 미-중-소 데탕트처럼 미국에게 유리한 세력균형으로 이끌지, 아니면 서방 동맹의 균열이 깊어지는 미국에 맞서는 중국 주도의 북-중-러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지는 이 데탕트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작용과 반작용에 달려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게임에서 남북 관계의 개선은 남북한 모두에게 한반도에 미치는 주변 열강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데탕트는 사실 1960년대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먼저 동구권과의 “데탕트(긴장 완화), 앙탕트(우호), 협력”을 표방하고, 1969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한편 화해를 추구한 동방정책을 펼친게 시작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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