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뉴스 속살]눈 뜨고도 당하는 신종 보이스피싱..한순간에 희망 앗아간 수화기 너머 '그놈'

송승윤 입력 2018.06.12. 08:11 수정 2018.06.1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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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 받게 만드는 신종 보이스피싱 수법
대환 대출 이유로 4200만원 뜯고서 '잠적'
'어눌한 한국말', '연변 사투리'는 옛말


[아시아경제 송승윤 기자] “그 돈이 어떤 돈인데…정말 죽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드네요.”

11일 만난 황모(32·여)씨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뜬 눈으로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는 황씨의 입에선 연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그는 지난달 30일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에게 4200만원을 뜯긴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자다.

서울 송파구에서 여성 의류점을 운영하는 황씨는 보이스피싱 탓에 가게 보증금과 선결제한 옷값 등을 모두 허공에 날리게 됐다. 기존에 사업 자금으로 사용하던 대출보다 더 저렴한 대출로 갈아타고자 대환대출(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은 뒤 이전의 대출금이나 연체금을 갚는 제도)을 알아본 것이 화근이 됐다.

옷집을 차리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약 10년간 백화점에서 근무하며 모아뒀던 돈에 신용카드 대출을 더해 황씨는 지난해 드디어 자신만의 가게를 갖게 됐다. 의류업에 뛰어든 지 1년여 만에 가게 매출도 서서히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매일 새벽 의류 시장을 찾아 직접 옷을 고르는 등 잠을 아끼면서까지 열심히 발품을 판 결과다. 최근에는 온라인 쇼핑몰도 문을 열었다.

조금씩 사업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연스레 돈이 필요하게 됐다. 그러나 기존에 이용하던 대출 금리가 너무 높은 탓에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지자 우선 황씨는 조금 더 저렴한 금리의 대출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대출 이자를 줄이고 돈을 조금씩 모으면 사업 자금을 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낯선 이의 전화 한 통에 이 같은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황씨는 지난달 29일 제1금융권인 A 은행에서 상담을 받았으나 대환대출을 거절당했다. 이어 무거운 마음으로 은행 문을 나선지 1시간여 만에 황씨는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보이스피싱범이었다.

자신을 A 은행 계열사인 캐피탈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보이스피싱범은 황씨에게 “대환 대출을 알아보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황씨가 대환대출을 알아봤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금융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던 탓에 황씨는 의심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대출 상담을 받게 됐다.

보이스피싱범은 황씨에게 6%대 최저금리로 정부지원자금 대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범은 “오늘은 마감 시간이 다 돼서 내일 진행을 해야 한다”면서 “우선 본인인증 어플을 설치하면 내일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황씨는 보이스피싱범이 시키는 대로 휴대전화에 어플을 설치했다. 이 어플에는 은행명과 함께 로고도 찍혀 있었다. 은행권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어플과 비슷했다. 그러나 해당 어플은 모든 전화가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연결되도록 설계된 어플이었다.

다음 날인 30일 전화 통화에서 보이스피싱범은 대출 승인이 나려면 기존에 이용하던 대출을 일부 갚아야 한다고 황씨를 속였다. 이 말을 듣고 황씨는 은행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담원의 안내에 따라 1000만원을 상환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이는 은행 상담원이 아닌 같은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 전날 미리 내려받은 어플 때문에 실제 은행 전화번호를 눌러도 보이스피싱 조직에게로 전화가 연결됐던 것이다.

입금 후 보이스피싱범은 30분 안에 대출이 실행될 거라고 황씨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황씨가 이유를 묻자 그는 오류 코드가 떠서 대출이 늦어지고 있다며 무슨 이유인지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은행 마감 시간이 다 돼서야 보이스피싱범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다른 카드사에서 이용 중인 대출도 갚아야 한다”며 “내일 나머지 대출을 정리하면 바로 금액을 입금시켜주겠다”고 또다시 하루를 넘겼다. 보이스피싱범은 황씨가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현란한 말솜씨로 그를 안심시켰다. 평소 서툰 한국말이나 연변 사투리로 대표되던 보이스피싱범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련된 말투의 보이스피싱범은 정확한 표준어와 함께 전문적인 용어까지 사용했다.

결국 황씨는 31일 1800만원을 보이스피싱범이 불러주는 계좌로 입금시켰다. 이 과정에서 은행 직원을 사칭한 이는 엉뚱하게도 개인 계좌번호를 불렀다. 황씨가 “왜 개인 계좌로 돈을 보내느냐”고 묻자 직원은 태연하게 “원래 대환대출은 법률팀 계좌로 넣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도 돈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늘상 전화를 걸던 은행이었기에 황씨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1일 보이스피싱범은 인지세 신청을 해야 한다며 국세청에 9백만원을 납부하라고 시켰다. 마지막에는 대출 진행 과정 중에 오류코드가 너무 많이 떠서 5백만원의 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속여 도합 4200만원을 뜯어내고 나서야 그들은 범행을 멈췄다.

마지막까지 일을 진행시켰음에도 돈이 들어오지 않자 황씨는 그때야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급히 은행에 신고했지만 일부 금액은 벌써 빠져나간 뒤였다. 은행 관계자는 황씨에게 "고객님 외에도 다른 피해자들이 같은 통장으로 돈을 송금했다가 피해를 봤다"며 "두 계좌는 지급 정지가 돼서 돈이 묶여있으나 일부는 빠져나갔고, 다른 이들의 돈까지 같이 들어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범행 과정 내내 그들은 황씨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입금이 안 되면 1년 내에 대환대출을 진행할 수 없다며 조바심을 내게 하는가 하면 금융감독위원회와 국세청 등에서 발행한 서류가 필요하다면서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황씨는 대환대출을 위해 보이스피싱범이 입금을 요구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급전을 빌렸다. 결국 대출금은 대출금대로 갚아야 하고, 기존 대출금 이상의 빛까지 지게 된 셈이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이런 방법이 실제로 가능한 줄은 상상도 못했다.

황씨는 "실제 존재하는 기관 전화번호로 직접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이미 돈이 빠져나간 뒤라 범인을 잡더라도 피해액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탄식했다.

피해자들이 돈을 송금한 계좌에 대해 지급정지 조치를 한 서울 강동경찰서는 통장 소유자와 용의자 추적에 나섰다. 경찰 관계자는 “수개월 전부터 전화를 걸면 무조건(보이스피싱 조직으로) 연결되게 만드는 어플을 깔게 하는 수법이 나오고 있다”며 “다른 피해자가 더 있는지는 수사를 진행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송승윤 기자 kaav@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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