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의 회한 서린 아단성, 서울 아차산성일까 단양군 온달산성일까?

임기환 2018. 6. 1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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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47] 단양군 영춘면에는 세칭 온달산성이라 불리는 산성이 있다. 고구려 장군 온달의 비극적 최후를 담은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요즘에는 산성 아래에 영화촬영 세트장 등 관광지로 개발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양강왕(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溫達)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게 생각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다 하지 말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걸음에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했다. 온달이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아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를 장사 지내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판이 났으니, 아아! 편히 돌아가시라" 하니 그제야 관이 들렸다.

유명한 '삼국사기' 온달전의 마지막 대목이다.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 즉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계립령은 오늘날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이다. 이 일대는 삼국 간에 쟁패가 치열하였던 전략적 요충지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아단성=아차산성' 설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주로 충돌한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도 아차성(阿且城)이 등장하는데 책계왕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사성(蛇城)과 함께 쌓았다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 도성을 탈출하던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도 바로 아차성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차성이 한강 하류의 요충지로서 오늘날의 아차산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차성(阿且城)과 아단성(阿旦城)은 글자가 다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름에 '旦'이 있어, '且'로 피휘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旦'을 피휘할 때는 그 뜻을 따라 '朝'로 표기하기도 한다. '여지도서'에 '乙阿旦縣'을 '乙阿朝縣'으로 바꾸어 표기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절요'나 '동국통감'에서는 아단성과 아차성을 혼용하기도 하고, 또 '旦'과 '且'의 글자가 비슷해서 판각시에 착종이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이름상으로는 아차성과 아단성을 동일한 성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단성=온달산성설도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이다. 이곳의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이나, 온달의 공언한 계립령 및 죽령과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는 온달 관련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며 유력한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온달산성 : 영월군 영춘면 소재. 지금 남아있는 온달산성은 신라가 쌓은 산성이니, 결국 온달은 죽어서 신라 산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생전에 못다한 회한을 푼 것인가.

그러나 아직 한강 하류를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강 상류 영춘지역까지 신라 영토 내륙 깊숙이 공세를 취한다는 게 군사전술상에서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런 모험적인 전술이 신라군의 의표를 찌르게 되어 성공할 수도 있고, 이런 기습 작전이 성공한다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위협, 차단하게 되어 한강 상류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가 효과적인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매우 위험한 작전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평원왕의 부마인 온달에게 과연 허용되었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더구나 현재 온달산성의 위치는 고구려가 남정(南征)할 때 주요 교통로로 사용하였을 춘천에서 홍천, 원주를 지나 충주에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계립령 루트 혹은 단양에서 영주로 이어지는 죽령 루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물론 온달산성이 위치한 영춘 지역도 곶적령(串赤嶺)을 넘어 영주 비봉산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역시 단양 적성에서 이어지는 죽령로의 본 루트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군이 영월, 영춘으로 우회하여 남진하던 도중에 영춘의 온달산성에서 온달이 전사하였다는 견해도 있지만, 아단성을 온달산성에 비정하는 선입관에서 나온 지나친 추정이 아닌가 싶다.

역시 당시의 정세에서 볼 때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공격이라면 한강 하류에서 임진강을 건너 현 아차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603년(고구려 영양왕 14년, 신라 진평왕 25년)에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고, 신라 진평왕이 직접 1만군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북한산성의 신라군과 호응하였기에 고구려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그래서 위 기사를 온달의 공격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장군 고승(高勝)이 곧 온달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온달의 공격에 대해 정확한 시점은 나와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영양왕 초기이기 때문에, 590년 이후 603년 이전 어느 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 신라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북한산성이 아니라 바로 한강변의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에서 '北漢山城'명 기와가 출토되어 아차산성이 곧 신라의 북한산성임이 고고자료로도 확인되고 있다. 아차산성 위치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보루성이 산재해 있는 한강변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603년의 고구려의 공격이 아차산성이라면 그 얼마 전에 온달이 공격한 아단성도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온달의 공격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53~568년 기간에 고구려가 신라의 한강유역 영유를 묵인하고 대신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공세를 중단하는 양국 간 밀약을 깨뜨리는 새로운 전략이다. 이는 영양왕대 본격화된 고구려의 새로운 국제전략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금의 한강변 아차산성이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라면, 왜 영월 영춘의 온달산성 일대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가 남게 된 것일까? 이들 설화가 온달이 이 지역에서 전투를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한 것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문헌자료를 찾아보면 영춘의 온달산성에 온달과 관련된 기사가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영조 이후의 문헌부터이다. 그 이전 문헌에서는 단지 '성산고성(城山古城)'에 대한 기록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부터 성산고성에 온달전승이 더하여 기록되고 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여러 지리지 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춘의 옛 지명이 '을아단'이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온달전승과 연계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충(忠)의 표상으로서 온달에 대한 기억을 널리 환기시키려는 뜻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42년에 발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고성의 이름마저 아예 '온달성'으로 기록하면서 전승의 결합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서울 아차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동상

이처럼 영춘에서 온달 전승이 조선후기에 적극적으로 환기된 것처럼, 계립령인 하늘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온달 전승이 유포되어 있다. 역시 실제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지역 전승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오늘날에는 서울 아차산에서도 온달전승이 새삼스레 환기되고 있다. 특히 고구려 보루성과 연관하여 적극적으로 온달의 이미지가 여러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동상도 만들어지고 온달장군 주먹바위, 평강공주 통곡바위 등 그럴싸한 이름이 아차산 곳곳에 붙여지고 있다.

이렇게 온달 전승이 생명력을 갖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온달 전승에 민중들의 꿈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곳곳에서 온달 전승을 옛 유적과 연결하여 환기하는 것도 역사를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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