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소'에 어린 우리 문화재 슬픈 유랑사

노형석 2018. 6. 1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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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백제관음상, 일제강점기 때 일 반출
일 수집가 이치다 별실 전시 기록도
불상출토·유통·발굴경위 조사해야
소장가와 협상 등 귀환방도 찾아야
지난 연말 일본 도쿄에서 국내 일부 미술사학자들에게 공개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최근 사진.

한없이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닌 1400년전 한반도 불상의 걸작은 어쩌다 식민지 역사의 질곡에 휘말리게 된 것일까.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돼 일본 소장가의 수중에 들어간 뒤 반출됐다는 이야기만 전해지던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한겨레> 보도(6월 4일치 1, 21면)로 지금껏 일본에서 온전히 보존되어온 사실이 알려지자 환수 논의와 더불어 불상의 유랑에 얽힌 묵은 풍문들이 다시 입길에 오르는 중이다. 여전히 안개에 싸인 구석들이 많지만, 백제 금동관음상의 과거사를 더듬어보면, 가슴저린 사연들이 빼곡하다. 경매와 밀실거래로 경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일본 수장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묻혀버린 이땅 문화유산들의 기구한 운명을 함축한 까닭이다.

백제관음상은 세상에 나온 내력부터 확실치 않다. 1907년 한 농부가 규암리 벌판을 파다가 쇠솥을 찾아내 그 안에서 이 불상과 같은 이름의 국보 293호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을 함께 발견했으며, 혼다라는 이름의 일본 헌병이 농부한테서 압수 소장하다 헌병대장에게 인도하면서 경매와 매매를 거쳐 일본 소장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는 게 기존의 통설이다. 이런 내용은 30년대 이후 일본에서 나온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 언급된 이래, 1939년 나온 <미술연구> 90호 등 일본의 여러 미술관련 저술들과 한국미술사학회가 1973년 펴낸 <일제기문화재피해자료> 등에 계속 소개됐다. 당시로서는 가장 유력한 잣대였던 학계와 소장자의 권위, 명성을 업고 공식 내력으로 자리잡게 된 셈이다. 그러나 정인성 영남대교수 등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난사를 탐구해온 일부 연구자들은 통설 자체를 부인한다. 이런 기록들이 1922년 백제관음상을 다른 일본수장가와의 거래를 통해 손에 넣은 뒤 일본에 반출한 당시 소장가 이치다 지로의 회고담에 전적으로 바탕한 것이어서 엄밀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작품 유래를 입증하는 명확한 기록물(레코드)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불상의 출토 및 이후의 유통, 반출 경위에 대한 조사를 벌여야한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정면과 옆모습을 담은 옛 사진. 1939년 일본에서 발간된 <미술연구> 90호에 실렸다.

이치다는 도굴한 문화재를 대량 반출해 악명놓았던 오구라 다케노스케(1896~1964)와 더불어 식민 조선에서 삼국시대 고분 부장품과 불교관련 유물들을 집중수집했다. 대구에서 의사로 일했던 식민지시대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해방 뒤 행적과 몰년도 안개에 싸여있는 인물이다. 1986년 이래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해외소재 한국문화재 목록>엔 이치다가 1929년 대구의 신라예술품 전람회에 출품한 소장품 목록을 바탕으로 139건 284점을 그의 컬렉션으로 명시해놓았지만, 실제로는 1000점이 넘는 방대한 수장품을 갖고 있었고 백제관음상 등 상당수는 해방 전후 유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9년 전시 뒤 불상 등을 지인들에게 간간이 자택에서 보여주었다. 1939년 도자사 전문가인 고야마 후지오가 별실에서 백제 불상을 비롯한 신라 유물들을 보며 찬사를 보낸 기록이 전한다. 고야마는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두고 “조선의 3불 가운데 하나로 정평이 나있는 것인데, 조금 허리를 비틀고 서있는 자태가 빼어나고 미소 지은 얼굴이 아름답다. 일찍이 조선 불상에서 이 정도로 뛰어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일설에는 이치다가 해방 뒤 부산에서 한 거간꾼에게 무덤 발굴품 등 상당수 유물을 나중에 찾겠다며 맡겼는데, 이들 중 상당수를 거간이 빼돌려 나중에 ㄱ대와 ㅅ대 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으로 학계에 전해져온다. 그는 일본에 가져온 유물 상당수도 1970년대 죽기 직전 현지 업자들에게 다수를 팔았는데, 국립규슈박물관이 입수해 소장한 창녕 고분 출토 금동관과 말갖춤 유물들이 대표적인 것들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이미 소문난 명품이었던 만큼 해방 뒤 학계에서 백제관음상은 집중적인 추적 대상이 됐다.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관장은 일본인 니와세 노부유키의 수중에 있던 국보 293호 불상을 압수해 박물관 소장품으로 등재하면서 다른 짝인 일본 소재 불상을 계속 찾았다. 3대 관장 황수영도 일본에 출장갈 때마다 이치다의 소재를 탐문했으나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이 불상의 출토반출 경위에 대한 기초 연구를 이한상 대전대교수 등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지난 1월초 국립박물관회의 젊은 기업인 모임이 환수해 화제를 모은 14세기 고려시대 불감(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나무, 금속 등으로 만든 작은 감실)이 이치다의 과거 소장품이었는데, 박물관 쪽이 일본의 주요 고미술 화랑들을 뒤지며 불상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이 불감이 확인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저간의 사정들을 봐도 이 불상을 귀환시켜야할 명분은 차고 넘친다. 안타까운 건 환수에 필요한 유물 가액을 논의하는 금전 협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소장자는 국내의 반환 논란이 커질 경우 유물가액에 대한 협의를 끊고, 국제 경매에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 현지에서 오래 전 공인된 개인 소장품인만큼 소장자의 매도 행위를 한국 정부가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널리 공개된 사실들은 아니지만, 국립박물관 관계자들 사이에는 이와 관련해 ‘쓰라린 전례’들이 입에 오르내린다. 수년전 국내 미술사 관련 학회에 구체적인 소장 상황이 보고되면서 박물관이 환수협상을 준비했던 쓰시마 소재 고려시대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일본 규슈박물관이 정보를 듣고 바로 구입해 소장하면서 환수기회를 놓친 바 있다. 또,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 나전칠기 전 ‘천년을 이어온 빛’에 출품됐던 일본 소장 12세기 나전모자합도 전시 뒤 환수를 검토했으나, 미국 소장가에게 바로 팔려 국내에서 다시 볼 기회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지난 연말 백제관음상을 실견한 최응천 동국대 교수는 “과거 협상을 머뭇거리다 기회를 잃어버린 전례를 되풀이하면 안된다”며 “한국 미술사 최고의 명품을 불법성 규명, 반환 등의 명분만 내세우다 놓치면 나라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반출의 불법성에 주력하는 장기적인 확인 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우선 명분에 걸맞게 적정한 매입가액을 조율하는 협상 전례라도 만들어야 외국 소장가 수중에 숨은 다른 걸작들도 세상에 나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미심쩍은 출토, 반출 경위를 파악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문화재당국이 소장가 쪽과 추진할 환수 협의에서 작품 가액을 둘러싼 이견을 함께 풀면서 신속한 귀환 방도를 찾아야하는 게 지금의 과제다. 북미 비핵화 회담만큼이나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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