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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상업영화 상영·남녀 동반근무.. 왕세자 주도 '온건화' 바람

임국정 입력 2018.06.19. 10:03
사우디 '비전 2030' 역점 추진 / 이슬람 율법 따른 엄격한 제약 풀어 / 女, 축구경기 관람·운전·군입대 허용/ '형제세습'서 '부자세습' 시대 본격화 / '반부패 청산' 명분 왕족 숙청 작업도 / 저유가로 복지 줄어든 청년층 대상 / 개혁·개방정책으로 민심 잡기 총력 / '새로운 길 ' 제시.. 지지기반 다지기 / 일각선 서방 향한 보여주기식 비판

“엔터테인먼트는 새로운 석유다.”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로 꼽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바파라트 엔터테인먼트청(GEA) 청장이 한 말이다. 사우디의 차세대 지도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4월 당국자들과 함께 3주 가까이 미국에 머물며 정·재계 인사들과 두루 마주했다. 이들은 디즈니, 애플, 구글 본사를 잇달아 방문하는가 하면, 넷플릭스, 워너브러더스, NBC유니버설 경영진을 만났다. 빈 살만 왕세자는 아랍식 전통복장 대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양복 차림으로 제프 베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CEO 등과도 대면했다. 구글을 방문했을 때는 편안한 청바지 재질의 바지를 입어 눈길을 끌었다.

GEA 대변인은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을 지칭하며 “테마파크와 리조트, 라이브 쇼 등 이 회사들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디즈니 유치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문화에 엄격한 제약을 가해오던 사우디가 달라지고 있다.

러 월드컵 개막식 관람하는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 두 번째)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네 번째)과 함께 지난 1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을 관람하고 있다.
모스크바=TASS연합뉴스
◆‘온건화’ 바람 부는 사우디

지난 4월18일(현지시간) 사우디에서 35년 만에 첫 상업영화 ‘블랙팬서’가 상영됐다. 아와드 알라와드 사우디 문화정보부 장관이 이날 다른 관객들과 함께 수도 리야드에 있는 AMC 체인 영화관에서 팝콘 상자를 손에 든 채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사진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사우디는 2030년까지 영화관 약 350개를 열어 2500개가 넘는 상영관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우디에도 상업 영화관이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보수적인 신정일치 통치로 급변하며 사우디 왕정체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사우디도 엄격한 이슬람 정책을 펼치며 대응했고, ‘반이슬람’으로 간주된 상업영화 상영은 1980년대 초부터 전면 금지됐다.

영화 캐릭터와 사진 찍는 사우디 여성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지난 4월30일(현지시간) 리야드에 개장한 중동 최대 영화관 프랜차이즈인 복스시네마에서 영화 캐릭터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리야드=EPA연합뉴스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 일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최근 사우디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래서 더 놀랍다. 애플의 남녀 동반 근무 허용 신청에 사우디가 긍정적으로 화답하며, 사우디 애플 사업장에서 남녀가 함께 근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사우디는 지난 1월 그동안 금기시해 온 여성의 축구경기장 입장을 허용했다. 여성 차관이 임명되는가 하면 여성 군입대도 가능해졌다. 6월24일 여성 운전 금지령 전면 해제에 앞서, 지난 4일에는 10명의 여성에게 첫 번째 운전면허를 발급했다.

◆내부에선 ‘칼바람’

‘온건화’ 바람의 중심에는 지난해 부왕세자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빈 살만이 서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ing)으로 불린다.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2015년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의 뒤를 이어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에 임명되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살만 국왕이 83세로 고령인 탓에 33세에 불과한 빈 살만은 ‘사우디 역대 최연소’ 국왕에 오를 가능성도 크다.

60년 넘게 지속돼 온 ‘형제세습’국가인 사우디에서 빈 살만의 왕세자 책봉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근대 사우디 왕국을 건국한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은 수십명의 아들 사이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형제간에 연장자순으로 왕위를 계승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왕좌를 지키고 있는 살만 국왕은 2015년 80세의 나이에 2세대 중 여섯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왕세제였던 동생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를 폐위하고 자신의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왕세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자기 아들인 빈 살만으로 왕세자를 전격 교체했다. ‘부자세습’시대의 막을 직접 걷은 것이다.

왕족들의 불만은 당연했다. 결국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해 11월 ‘반부패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왕족 숙청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왕세자의 잠재적 경쟁자들인 왕자들을 포함해 300명이 넘는 왕족들을 리야드 리츠칼튼호텔에 감금했다. 이들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내놓고 정부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강력한 정적이자 폐위된 무크린의 아들 만수르 빈 무크린 왕자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목표는 ‘비전 2030’

부자세습시대의 문을 연 빈 살만 왕세자는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장기 경제계획인 ‘비전 2030’(VISION 2030)을 강력히 추진하고 나섰다. 사회·문화 ‘온건화’를 비롯해 본격적인 개혁·개방조치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석유 의존 경제구조에서 벗어나려 원전과 태양광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민간 기업의 기여도를 늘리는 방향으로 경제 전략을 선회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집트 등과의 교류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비전 2030’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던 기득권, 보수 종교세력들을 향해서는 ‘피의 숙청’을 자행했다.

‘비전 2030’은 국민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0세 이하 청년들의 ‘민심’을 잡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저유가로 국가 재정 수입이 줄어들자 에너지 보조금을 축소하는 등 복지 혜택을 줄이고, 올해 1월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며 이미 자구책 마련에 나선 상태다. 이전 부모 세대처럼 공공부문 일자리가 보장되지도 않고, ‘오일 머니’로 인한 경제적 지원금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빈 살만 왕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길’은 사우디 청년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혁·개방정책이 서방을 향한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사우디가 여성 운전 금지령과 후견인 제도 등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온 여성인권 운동가들을 지난달 체포하자 이런 주장이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사라 리 윗슨은 “왕세자의 개혁은 여권·인권 신장을 꾀하는 진정한 사우디의 개혁주의자들에게 오히려 공포”라며 “체포된 활동가들의 유일한 혐의는 왕세자가 추진하기도 전에 여성의 운전 권리를 주장했다는 것뿐”이라고 비판했다.

왕세자를 중심으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사우디가 어디로 튈지는 미지수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3월 미국 CBS 방송 인터뷰에서 ‘무엇이 (사우디에 대한) 당신의 통치를 멈추게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죽음뿐”이라고 답하며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동시에 “(지난 40년간의 사우디는) 진짜 사우디가 아니다”며 “우리는 드디어 정당화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끝마치고 있다”고 변화의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어찌 됐든 ‘새로운 석유’를 퍼 올리기 위한 사우디호의 시추는 이미 시작됐다.

임국정 기자 24hou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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