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잔·원고 청탁.. 비 내리는 한여름밤의 '책 파티'

기자 2018. 7. 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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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가 직접 짠 ‘아치형 서가’가 아름다운 ‘책과생활’ 서점. 이곳에선 ‘심야의 오픈북 책방 고사’가 벌어졌다.
레스토랑과 서점을 겸하고 있는 ‘지음책방’의 심야책방 풍경. 서너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맥’을 하며 책을 보기도 했다.

- 매월 마지막 금요일 밤 ‘심야책방의 날’

전국 77곳 서점서 첫 행사

다양한 이벤트로 손님 맞아

광주 ‘책과생활’선 책방고사

‘지음책방’은 타로점 이벤트

손님의 절반 이상이 여행객

부족한 주민참여 숙제 남아

‘2018년 책의 해’ 프로그램의 하나로 서점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책 손님을 맞는 ‘심야책방의 날’.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강성민(글항아리 출판사 대표) 책의 해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이 지난 6월 29일 광주(光州)의 심야책방들을 찾았다. 동네 책방 활동이 활발하고 서울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서점이 참여한 그곳에서 강 대표가 무박 2일 심야책방 탐방기를 전해왔다.

6월 29일 ‘불금’, 전국 77개 서점에서 심야책방이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6월부터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열리는 ‘심야책방의 날’이 그랜드 오픈을 한 날이다. 광주에서는 무려 9개나 되는 서점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 광주는 동네 책방이 유독 활발하다. 서점들끼리 유대와 친목이 좋아 지역 이곳저곳을 다니며 공동 부스를 열기도 한다. ‘심야책방의 날’ 기획자로서 행사 준비를 하던 중 이런 내용을 알게 돼 이들의 더부살이가 만들어낼 심야의 풍경을 엿보고자 광주로 향했다.

그 중심엔 광주의 동네책방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내려와 터를 잡은 신헌창 대표가 있다. 아시아문화전당 주변 허름한 건물 2층에서 ‘책과생활’을 운영하는 신 대표는 이번 행사에 참여하라고 서점들에 ‘카톡 연판장’을 돌린 주인공이다. 필자가 이날 ‘책과생활’을 찾은 시간은 오후 7시. 서점은 행사 준비로 어수선했다. 마침 지역에서 활동하는 목수가 직접 짠 아름다운 ‘아치형 서가’가 완성돼 큐레이션 작업이 한창이었다. 신 대표는 “오늘 단골 독자들이 좀 오실 것 같다. 금요일에 다들 약속이 있어서 아마 10시 이후면 많이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책과생활’이 준비한 오늘의 행사는 ‘심야의 오픈북 책방 고사’다. ‘다음 문장이 들어간 책을 찾아 제목, 저자명, 출판사명을 적으시오’라는 문제를 냈다. 지문은 다음과 같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풍부한 나라였고 역사의 중요성을 인지한 권력자들이 기록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문제가 어려웠던지 손님들의 원성이 터졌고 정답자도 1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번 맞혀보시라. 힌트는 지문의 두 어절을 떼어내 조합하면 정답이라는 것. ‘책과생활’ 측은 야밤에 시험 치느라 고생하는 손님들을 위해 얼음을 가득 채운 ‘농사용 손수레’에 캔맥주를 쏟아 넣고 무한대로 제공했다.

이날 광주엔 어마어마한 소나기가 내렸다. 9시쯤 ‘책과생활’을 나와 우산을 쓰고 서석동의 ‘라이트라이프’를 찾았던 나는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서점에 도착했다. 수줍어하는 청년 김대선 대표가 반갑게 맞아줬다. 전통 한옥에 둥지를 튼 라이트라이프는 문설주에 ‘輕量生活書店(경량생활서점)’이라고 모토를 적어놓았다. 나는 한쪽에 마련된 고즈넉한 탁자에 앉아 미션카드를 작성했다. 그날 심야책방에 참여한 전국 77개 서점이 공통으로 수행하는 미션이다. 서점을 방문한 손님이 ‘책, 서점, 밤’과 관련된 카피를 카드에 써넣으면 책의 해 조직위가 잘 된 걸 골라 작가에게 글을 받는다. 이른바 ‘심야의 원고청탁’이다. 마침 지옥처럼 퍼붓던 비가 그쳐 나는 ‘소나기가 그친 여름밤’이라고 써보았다. 수줍게 물방울 모양도 그려 보았는데 감미로운 놀이를 하는 느낌이었다.

발길을 돌려 ‘타인의책 지음책방’으로 향했다. 지음책방은 레스토랑과 서점을 겸하는 곳이다. 오후 10시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분위기 좋은 바에 들어온 듯했다. 서너 명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혼자 와서 ‘혼맥’을 하며 책을 읽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타로점 봐주기.’ 지음책방 김정국 대표와 친한 사업가가 탁자에 담요를 깔고 타로점을 봐주고 있었다. 필자도 얼떨결에 이끌려 타로점을 봤는데, 결과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일을 실행해도 좋고, 7월에는 ‘사기당할 운’이 있으니 조심하라”였다. 한 달에 1권 페미니즘 책을 정해 판매하고 토론도 하는 지음책방 대표는 인스타그램으로 원고를 청탁하고 일반인 18명이 필자로 참여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에게 열변을 토했다. 결국 샀다. 그가 지역의 흑맥주를 권해 마셨는데 이 맥주를 마지막으로 공장이 망했다고 한다. 맛이 달곰씁쓸했다. 손님의 절반 이상이 여행객이라며 책에 대한 지역 주민의 무관심을 토로하던 김 대표는 11시가 넘자 갑자기 맥주 두 병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지음책방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인문학이 강한 ‘심가네박씨’ 서점 주인장 부부를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동네서점들 사이의 정이 느껴졌다.

연지책방은 전남대 후문에 위치한 무인책방이다. 출판사들이 거절한 큰오빠의 원고를 책으로 내주고 싶어 막내인 대학생 여동생이 출판사를 차린 게 연지책방의 씨앗이 됐다. 지금은 여동생의 둘째 오빠가 넘겨받아 출판사와 서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휴대전화에 연지책방 앱을 깔면 출입구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책을 골라 바코드를 리더기에 대면 낭랑한 안내 목소리가 나오고 그대로 따라 하면 카드결제가 완료된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마침 팔려나간 책을 채워 넣기 위해 들른 민승원 대표와 만났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서점이라니, 너무 낯설고 참신해 이유를 물어봤다. “제가 출판사도 경영하고, 독립출판물 유통도 겸하는지라 서점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서죠. 공간이 좁아 제가 있으면 손님들이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그렇고요.” 그와 30분이 넘게 독립출판과 지역서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힘든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노력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다행히 이날 손님이 평소보다 많이 들었다. 내가 있는 동안 3명의 여성 고객이 책을 사 갔는데, 3명 모두 연지책방 첫 방문이었다. SNS에 올라온 심야책방 소식을 보고 방문했단다. 보람이 느껴졌다. ‘공통미션’도 무려 13명이나 수행했을 정도로 심야의 분위기는 나름 훌륭했다.

다시 책과생활로 돌아오니 새벽 2시. 맥주파티와 책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일본 한학자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의 이야기가 나와 나도 끼어들었다. 새벽 3시가 넘자 눈꺼풀이 내려왔다. “여러분 이제 제발 갑시다. 심야책방은 칠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도 열린다고요!”

글·사진 =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함께 읽는 2018 책의 해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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