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권력을 파헤치다

입력 2018. 7. 4. 14:57 수정 2018. 7. 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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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년, 한겨레 보도-12]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시리즈

[한겨레]

1987년 10월 30일, 서울 명동 기독교여자청년회 대강당에서 한겨레 창간 발기 선언대회가 열렸다. 한겨레는 ‘민중과 진실의 붓’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한겨레 자료

한겨레는 2001년 3월부터 두 달간 모두 25차례 70건의 시리즈 기사를 썼다.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였다. 이 연재 기획은 김이택 당시 사회부 차장의 제안에서 비롯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사회적 논란이 되던 시기였다. 한겨레는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언론사 역시 세무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조선일보 등은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한겨레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거론할 자격이 있느냐”는 투의 기사와 사설을 내보냈다. 본류를 벗어난 딴죽걸기가 한겨레를 오히려 자극했다.

2001년 3월 9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 시리즈

김이택 등 편집국 간부들은 심층 기획 기사로 한국 언론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보기로 뜻을 모았다. 사회부와 여론매체부를 중심으로 편집국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민완 기자들이 모두 여기에 달려들었다.

한겨레는 언론권력 시리즈를 통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정치권력과 유착해 이권을 챙긴 과거와 현재를 낱낱이 파헤쳤다. 성역으로 간주됐던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이 속속 드러났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대에 밀려 세종로 앞 도로가 좁아지고, 지하철 노선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둔갑했다. 애초 도시계획에 포함됐던 세종로 광장도 들어서지 못했다.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코리아나 호텔은 시유지를 무단으로 차지해 주차장 진입로로 썼다. 사주 방씨 일가 묘역은 주변 임야를 무단으로 훼손하고 불법으로 진입로를 냈다. 조선일보사는 구청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시내 한복판에 불법 광고판을 세워 계속 운영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 홍진기 묘역도 주변 임야를 불법으로 훼손한 뒤에 만들어졌다.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은 서울 시내 최고 규모인 자택을 흑석동에 짓고 구청 허가 없이 마당에 정자를 지었다. 방씨 일가는 전국 곳곳에 30여 만 평의 땅을 사들였고 이 가운데 일부는 부동산실명거래법 위반의 의혹이 있다. 동아일보사는 마라톤 육성을 명분으로 재단을 만든 뒤, 이를 내세워 부동산을 사들였다.

이 모두가 3월 19일자까지 나간 ‘심층해부 언론권력’ 1부에서 소개된 내용들이다. 지금껏 어느 언론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사들이었다. 보수 신문의 불법과 비리를 밝힌 대목 하나하나가 모두 특종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폐간에 이른 1940년까지 매년 신년호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찬양 기사를 실었던 조선일보.
1930년대 후반부터 폐간에 이른 1940년까지 매년 신년호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찬양 기사를 실었던 동아일보.

3월 28일부터 보수 신문의 역사를 다룬 2부가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친일 사업가 방응모가 인수한 1937년 이후 해방 때까지 신년호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1940년 신년호에선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렸다. 1939년 4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는 사설로 ‘성상 폐하’ 운운하는 생일 축하문을 썼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로 담당 기자를 쫓아냈다.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설을 줄곧 썼다. 두 신문은 일제의 침략 전쟁 동참을 독려하고 군수물자를 헌납했다.

2001년 4월 5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 시리즈. 조중동은 유신체제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기사를 썼었다.

해방 이후엔 군사정권을 미화하고 찬양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재벌의 비리를 숨기고 오히려 정당화했다. 선거 때는 집권세력에 유리한 기사만 편파적으로 내보냈다. 각종 시국, 공안 사건을 왜곡 보도해 여론을 호도했다. 사주들은 대통령 앞에서 굽실거리고 아부했다.

이어 언론 개혁의 대안을 모색한 3부 마지막 기사가 2001년 4월 27일자에 실렸다. 연재 기사가 나가는 동안 독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판 판매도 급증했다. 격려 전화가 쇄도했다. 일부 신문사는 한겨레의 비리를 찾아내라고 소속 기자들을 닦달했다. 한겨레의 비리를 제보하면 돈을 주겠다고 취재원을 꼬드긴 신문사도 있었다.

현직 조선일보 기자의 기고글이 실린 것도 화제였다. 2001년 3월 12일,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에서 익명의 조선일보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은 두 가지 이데올로기적 성벽이 크게 울타리를 치고 있다. 국가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그것이다. 입사 초기 진보적 성향을 보이던 기자들도 4~5년이 지나면 어느 샌가 조선 스타일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아무도 사주의 강요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묘하고 음습하게 그저 몸에 밸 뿐이다.”

조선일보는 이 기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한겨레는 끝까지 취재원을 보호했다.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썼던 조중동을 비판하는 2001년 4월 6일치 한겨레 1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 기획 기사와 관련해 한겨레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조선일보는 2001년 4월, 동아일보는 2001년 9월, 각각 70억 원과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족벌 언론답게 사주 일가에 대한 보도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일보는 2심 진행 도중 소를 취하했다. 동아일보는 끝까지 법원의 판단을 물었다. 2008년 2월 14일,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보도의 전체적인 취지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없고,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하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음을 근거로 한 원심의 판단은 모두 정당하다.”

동아일보사의 청구를 기각한 2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2001년, ‘언론권력 심층해부’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한겨레만이 축적해온 이 분야의 노하우 덕분이었다.

한겨레는 창간과 동시에 언론사 가운데 처음으로 언론 감시를 본업으로 하는 여론매체부를 만들었다. 여론매체부는 크고 작은 기사를 통해 보수 언론의 탈법과 불법을 파헤쳤다. 1988년 5월 15일, 창간특집호에 언론과 권력의 유착을 비판하는 기획 기사를 실었다. 곧이어 1980년 신군부의 언론인 대량 해직사태와 5공 언론의 실상을 폭로하는 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1996년 9월에는 보수 신문의 탈법 판촉 활동 등을 고발하는 ‘신문 전쟁’ 기획을 실었다. 1998년 7월에는 ‘신문개혁, 지금이 기회다’를 제목으로 언론계의 고질을 짚었다. 1999년 5월에는 ‘왜 다시 언론개혁인가’를 통해 대안을 제시했다. 1990년대만 따져도 언론 개혁과 관련한 굵직한 연재 기획을 10여 차례 실었다. 2001년의 장기 기획은 그 집대성이었다.

2004년 경기 고양시 일산구 한 아파트단지 앞에서 한 신문사 판매 영업사원이 스마트자전거를 진열해놓고 판촉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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