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누구를 위한 학폭위인가

류인하 기자 2018. 7. 1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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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012년 1월 배봉길 당시 대구수성경찰서장이 중학생 자살사건 수사결과를 브리핑하는 모습 / 연합뉴스

교내 모든 갈등을 처벌로 해결… 가해학생, 피해학생, 교사 모두 개선 요구 2011년 12월 22일 대구의 한 중학생이 ‘친구들의 괴롭힘을 견디기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해학생들의 집단적·상습적 가혹행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가 피해학생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정부는 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2012년 2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예방법)이 ‘처벌’ 위주의 강력한 형태로 개정됐다. 또 교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폭력행위를 학교폭력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심의·의결하도록 했다. 가장 낮은 처분인 서면사과조차도 모두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학폭위가 상시화된 교육현장은 삭막하게 변질됐다. 지나치게 사소한 일까지 모두 학폭위로 넘어갔다. 반면 학폭위에서 반드시 처리돼야 할 폭력행위가 여전히 은폐되기도 했다.

만 여섯살짜리의 작은 다툼도 다뤄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주희(가명·만 6세)는 현재 정신과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주희는 반 친구를 때렸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말 학폭위에 회부됐다. 학폭위에 신고된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손으로 ○○의 머리와 가슴을 한 차례씩 때렸다.’ 주희는 학기 초 과한 돌출행동을 하는 등 초등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친구들 사이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다. 사건은 상담교사가 아이들 집단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친구가 상담교사에게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때린 것이다. 주희의 부모는 피해아동의 부모에게 여러 차례 사과를 했지만 학폭위가 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며칠 뒤 학폭위에서 내려진 심의 결과는 1호 처분인 ‘서면사과’였다. 주희의 부모 ㄱ씨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도 지나지 않았다”면서 “도대체 만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갈등조차 교사가 중재권한이 없어 무조건 학폭위로 가져가 처벌하고 생활기록부에 기록한다는 게 올바른 학교의 모습이냐”고 말했다.

경기도의 중학교 3학년 민서(가명)는 전교 돌림 왕따를 당했다. 전교에서 소위 ‘일진’처럼 행동하는 아이와 추종세력이 각 반에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아이들을 상대로 왕따폭력을 저질렀다. 민서도 왕따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일진에게 다음 왕따로 지목당하지 않기 위해 반 친구들은 민서를 철저히 따돌렸다. 카카오톡 단체창에 초대한 뒤 초성으로 욕을 하거나 갑자기 전부 단체창에서 나가버리는 행동이 반복됐다. 수행평가 장소를 민서에게만 다른 곳으로 알려주거나, 아예 알려주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점심도 혼자 먹어야 했다. 민서는 약 한 달여 왕따로 살아오다 엄마에게 “나 죽고 싶다”며 피해사실을 고백했다. 민서의 부모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눈이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학폭위를 여는 대신 전학을 택했다. 선생님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담임교사는 민서의 부모가 ‘왜 그동안 아이의 피해사실을 몰랐느냐’고 따지자 “왜 당신 딸이 피해자이기만 할 거라 생각하느냐”고 했다. 가해학생의 부모는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였다. 학폭위를 열어봤자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의 처벌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민서는 현재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12일 서울 교육청 브리핑룸에서 이민종 감사관 등 감사팀원들이 숭의초등학교 폭력 은폐사건에 대한 감사결과 발표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26건의 개정안 국회 소위도 통과 못해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제 기능을 잃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가해학생은 가해학생대로, 피해학생은 피해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모두가 학폭위의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교육부는 요지부동이다. 지난해 12월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교장 자율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2018년 2월까지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 역시 지난해 12월 사안이 경미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동의한 화해가 이뤄졌을 경우 학교장 종결처리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낮은 수준의 처벌인 1호(서면사과)·2호(보복행위 금지)·3호(교내봉사)는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 않도록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교육현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교내 갈등이 학폭위로 넘어가고 있다. 교사의 재량판단은 여전히 불법이기 때문이다.

20대 국회에서만 학폭 예방법 개정 법률안이 지난 6월 말까지 총 26건이 발의됐다. 그러나 2016년 10월 21일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학폭 예방법 개정 법률안(전희경 의원 대표발의)은 2년째 교육·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19대 국회에서도 6건의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모두 자동폐기됐다. 전체 발의안 가운데 담임교사 또는 학교장에게 중재할 수 있는 권한을 담은 개정안은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사는 “의원들이 많은 개정 법률안을 냈지만 정작 학폭위 개선의 핵심인 ‘사전 중재’를 담은 안은 없다”면서 “학교장 종결권이 담길 경우 학교의 조직적 은폐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학부모 단체의 주장에 의원들도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학부모는 학교를 불신하고, 교사와 학교 관리자는 만에 하나라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제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안을 학폭위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모든 피해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학폭위의 당초 목적은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었지만 현재의 학폭위는 ‘처벌’ 위주의 준사법기구로 변질된 상태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왕따피해를 당한 아이의 아버지는 11일 전화통화에서 “학폭위가 얼마나 살벌하게 돌아가는지는 학폭위에 가해자 부모로든, 피해자 부모로든 가봐야 알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폭위 과반수를 구성하는 학부모 위원들을 보면 학교에 자식을 잘 보여야 하는 임원 엄마들이 대다수입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충분히 의견 진술을 할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교감에게 잘 보여야 하는 학부형들은 입을 닫고 있고, 일부 사람들만 계속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굉장히 모욕적입니다. 우리 아이는 피해자였는데도 뭔가 좀 더 말을 하려 하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 아빠인데 당신들이 나보다 이 사건을 더 잘 아느냐고 따지니 ‘아버님은 지금 여기서 질문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학폭위가 내 아이의 피해사실에 주목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게 편파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아이는 지금도 자해행위를 하며 고통스러워 하는데 가해학생에게 내려진 처분은 교내봉사였습니다.”

법지식이 전무한 위원회 구성원들이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현행법상 학폭위 구성원의 과반수는 학부모로 채우도록 정하고 있다. 학교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각종 은폐·편파 판단 등을 감시하고, 학부모의 의견도 함께 반영하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그저 자리만 채우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꺼린다.

한 일선 초등학교 교사는 “위원으로 활동하던 한 어머니는 자기 아이 반 남학생이 가해자로 학폭위에 회부되자 ‘선생님, 저 이번에는 못 하겠어요’라며 발을 빼기도 했다”면서 “자칫 자신의 아이가 다음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위원회를 구성하는 학부모 대부분은 학생회 간부 어머니인 경우가 많다. 그 결과는 학폭위의 파행운영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학부모 위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는커녕 교감이나 교사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는 일종의 ‘거수기’ 역할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박주형 경인교대 교수는 12일 교육부와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정책네트워크가 주최한 ‘2018 학교폭력 제도 개선방안’ 주제발표에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의 전문성과 신뢰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며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자치위원회 학부모위원의 비중을 현행 과반수(2분의 1)에서 3분의 1로 줄이고, 학생교육 및 청소년지도 전문가, 법조인 등으로 인력풀을 구성, 위원으로 위촉하는 등 외부전문가 비중을 높여나가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당초 목적 잃고 준사법기구로 변질 모든 처분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것도 개선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현재 학폭위에서 내려지는 모든 처분은 생활기록부에 기록되기 때문에 가해학생의 부모는 끝없는 소송전을 벌인다. 한 일선 고등학교 교사는 “고등학생들은 입시 때문에 생활기록부에 더 민감한데, 엄마들은 제 자식이 학폭위에 회부돼 낮은 수위의 처벌만 내려져도 기를 쓰고 이를 지우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방법은 다양하다. 가처분신청부터 각종 재심의 사유를 찾아내 분쟁조정을 신청하기도 한다. 민·형사·행정소송을 막론하고 소송으로 시간끌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졸업시점을 넘기면 어떤 처분이 내려져도 생활기록부에 기록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한 일선 교사는 “학폭위의 당초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라면서 “진보교육감들은 교사들이 반에서 벌어지는 작은 갈등도 스스로 풀지 못하게 막아놓고 모든 사안을 ‘법대로 하라’고만 한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교사는 “김상곤 장관은 자신이 경기도교육감일 때는 학폭위 처분 결과를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 않았다”면서 “교육부 훈령만 고치면 학폭위 처분 결과를 생기부에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데 장관이 된 지금 오히려 눈치를 보고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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