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잔병" "조용히 혼자 죽어"..군대조차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2018. 7. 1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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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① "우린 패잔병" 유령처럼 숨쉰다

사건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우리 현대사에는 사건만 남고 그 속의 사람들이 잊히는 일이 종종 있다. 2010년 천안함이 캄캄한 서해로 가라앉은 사건도 그중 하나다. 지난 8년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 기록할지를 두고 날 선 다툼이 벌어졌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아남은 장병 58명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사회는 지금껏 그들이 얼마나 아픈지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한겨레>와 <한겨레21>,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연구팀(김승섭·윤재홍)은 지난 3월부터 넉달에 걸쳐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조사’(실태조사)를 준비했다. 사전 연구와 취재 등으로 완성된 설문지를 활용한 실제 조사는 지난달 5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됐다. 이 조사에는 전체 전역자 32명 중 75%(24명)가 참여했다. 생존장병 8명은 최소 3시간 이상의 심층 인터뷰에 응했다. 과학적 조사를 통해 천안함 생존장병의 건강 실태를 확인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겨레>는 외면받아온 그들의 8년을 세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생존장병의 직함은 그 바다에서 그들의 시간이 멈춰 섰던 2010년 3월26일 당시의 계급으로 표기했다.

경기도 평택2함대 사령부에 설치된 천안함기념관에 숨진 장병들의 영정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함은혁(29) 하사는 바다를 좋아했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영웅이었다. 막연한 동경은 중학생 때부터 손에 잡히는 꿈이 됐다. 우연히 이웃 형의 방에서 하얀 해군 정복(세일러복)을 봤다. 눈이 부셨다. “난 해군 갈 거야.” 그 뒤로 그 꿈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2010년 3월26일, 그날 천안함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함 하사는 바다를 버릴 수 없었다. “배 타지 말라고 절대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것까지 막으면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전우들 몫까지 할 거예요.” 누구도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그해 여름 해군의 두번째 이지스함인 ‘율곡이이함’ 인수 요원으로 배에 올랐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날의 고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사격훈련 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리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렸다.

천안함 직후 정신적 충격 가중한 군
승선 원치 않는 생존자에 “배 타라”
천안함 청소·유품 수색 밀어넣기도
“내가…내가…얼마나 힘들었는데…” 전우들에게 받는 또 다른 상처
고통 잊지 못해 터져나온 한탄에
“죽으려면 스크루 쪽으로 떨어져”
“그 정신상태면 천안함처럼 패전” 제대로 된 마음치료 못받아
“정신과 진료 못받아” 79%
관심병사 우려·진료시간 못 얻어
절반 이상 “군의관이 고통 무시”

매일 홀로 전투를 치르듯 버텨온 그를 무너뜨린 것은 ‘적군’의 포격이 아닌 ‘아군’의 말 한마디였다. “바다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그해 가을, 함 하사가 6개월 전 겪은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한탄하듯 말하자, 그의 선임이었던 이아무개 중사의 입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말이 날아와 꽂혔다. “이 ××야, 죽으려면 스크루 쪽에 가서 곱게 죽어.” 함 하사는 8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크루에 몸이 갈리면 산산조각이 나거든요. 주검을 찾느라 야단법석 떨지 않도록 스크루를 향해 뛰어들란 이야기였어요. 어떻게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죠?” 이 중사는 함 하사와 같은 조타 직렬의 선임이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전우의 ‘칼을 닮은’ 한마디는 적의 기습보다 더 예리한 상처를 함 하사의 가슴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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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함 하사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털어놨다. ‘천안함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4명 가운데 21명이 군대에서 “패잔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24명 가운데 22명이 “생존장병에게 ‘천안함 폭침’의 책임을 돌리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16명은 “동료들이 내 고통을 무시했다”는 경험을 전했다.

천안함은 생존장병들에게 ‘낙인’이었다. 정주현(28) 하사는 ‘그날’로부터 4년 뒤인 2014년 ‘문무대왕함’을 탔다. 그해 리비아 교민 철수 작전을 위해 급파됐던 한국 최초의 스텔스 구축함이었다. 이 배에는 정 하사 외에 천안함 생존장병 한명이 발령받아 먼저 승선해 있었다. 그 밤의 고통을 공유했던 전우였기에, 정 하사는 그 생존장병에게 기댔다. “야, 재수 없으니까 둘이 떨어져 다녀.” 다른 동료 전우의 말에 정 하사는 충격을 받았다. “해군조차 내 편이 아닌데 대한민국 사람 누가 내 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천직처럼 여겼던 해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무신경한 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군 내부에서는 천안함 생존장병을 ‘패잔병’으로 봤다. ‘그날’ 이후 해군 교육사령부로 옮겨 근무하게 된 김정원(29) 하사는 “군인들의 음주운전 사고가 늘어 급하게 정신교육이 진행된 적이 있었어요. 교육에 나선 장군이 ‘2차 연평해전 지고, 천안함도 졌다. 너희들이 그런 정신 상태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저 살아남은 죄로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패잔병’ 취급을 받는 분위기에서 치유는 사치였다. ‘군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24명 중 19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원할 때 치료를 받았다”는 응답은 2명뿐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한 이유(복수응답 가능)에는 ‘관심병사로 분류될 것 같아서’와 ‘진료 시간을 따로 주지 않아서’가 각각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정주현 하사는 “관심장병이 되니까 못 갔죠. 윗사람들이 자기 부하가 자꾸 (정신)병원 간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국군수도병원이나 부대 의무실이나 약이 똑같았어요. 수면제랑 신경안정제. 용량만 달랐죠. 그래서 정신과 약은 그 두개가 전부인 줄 알았어요.” 이연규(30) 하사의 말이다. 그는 이어 “약을 먹어도 고통이 계속되니까 결국에는 ‘나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천안함 실태조사’에서 ‘군의관에게 고통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었다’고 응답한 생존장병은 13명, ‘엄살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고 답한 이도 15명에 달했다. ‘정신과 군의관을 믿을 수 있었다’는 장병은 4명뿐이었다.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하지만 군은 가혹했다. 생존장병 중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를 타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은 8명이었다. 전우들과 함께했던 기억이 생생한 천안함을 청소하라고 명령받은 생존장병은 8명, 전사자의 유품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이는 9명이다. 그날 밤 생사가 갈렸던 주검을 놓고 ‘전우가 맞는지’ 감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도 6명이나 있었다. 정주현 하사는 인양된 천안함을 뒤덮은 새카만 펄을 뒤져 자신의 출입증을 찾았다고 했다. “장교가 ‘유품은 찾아야 할 것 아니냐’고 신경질을 내더라고요. 펄을 긁어내다 내가 내 출입증을 찾았어요.” 군을 떠났어도 정 하사가 ‘그날’을 잊을 수 없듯이, 되돌아온 출입증도 그를 떠나지 못한 채 그의 방 벽에 걸려 있었다.

정환봉 최민영 기자,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bonge@hani.co.kr

국군병원 통틀어 정신과 의사는 30명뿐
“형식적 질문 뒤 신경안정제 처방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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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은 ‘사회’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에 노출되곤 한다. ‘목침지뢰 사건’이나 ‘K-9 자주포 폭발’ 등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근절되지 않는 군대 내 가혹행위 등도 장병들의 몸과 마음에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군 장병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같은 정신적 충격을 제대로 치료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겨레>가 국방부에 정보공개청구를 해 입수한 자료를 보면, ‘국군병원’에 근무하는 정신건강의학과 군의관은 30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40%인 12명은 경기도에 몰려 있다. 60만명의 군 장병이 전국 각지에서 복무 중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정신건강에 대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천안함 생존장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창표(30) 하사는 “진해에서 군복무를 했지만 정신과 상담을 받기 위해 대전까지 가야 했다”고 말했다. 경남 진해에서 근무했던 김정원(29) 하사도 “고통을 호소했더니 ‘치료를 받으려면 성남까지 오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어렵게 찾아간 국군병원의 정신과 치료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형식적인 질문을 몇개 던진 뒤 수면제나 신경안정제 정도를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군 장병들의 정신건강을 연구해온 박종익 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정신건강의학)는 “군이 군인들의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신과 진료는 화재 진압과 같아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장기간 방치되면 증세가 악화되고 회복도 더뎌진다”며 “천안함 생존장병의 고통도 오래 방치되면서 더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군은 ‘장병들은 전역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정신질환을 병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특수한 환경에서 위험을 겪을 가능성이 큰 군 장병들의 체계적인 정신건강 관리가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천안함 실태조사’를 진행한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과학)는 “정신과 치료의 문제는 생존장병들이 놓인 환경과 함께 봐야 한다. 군에서 이들은 패잔병 취급을 당했고, 동료·전우들이 전사한 천안함을 청소하는 등 사실상 ‘트라우마’를 키우는 명령을 받았다. 정신과 치료가 부족한 수준을 넘어,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수많은 갈등과 논란을 겪으며 전쟁터에서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저 버텨온 것”이라고 짚었다.

최민영 정환봉 기자,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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