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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생존자 최광수씨는 왜 한국을 떠나야 했나

입력 2018.07.16. 08:16 수정 2018.08.10. 11:56
[한겨레21]
폭침 8년 뒤에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시달리는 생존자 최광수씨 삶 재구성
정치적 이용뿐 보상 안 한 보수, 인권 외면한 채 불신의 상처 준 진보
한국 사회에 그들이 설 땅은 없었다

[한겨레]

천안함 생존자 최광수씨. 201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촬영. 최광수 제공

한국 사회에서 천안함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단어 하나도 민감하다. <한겨레21>은 그동안 천안함 ‘침몰’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이번 기사에선 생존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부분에선 ‘폭침’이라고 썼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천안함 ‘사건’ 등으로 표현했다.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지 8년이 지났다. 사건 원인을 둘러싼 논란에 초점이 맞춰진 가운데,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라졌다. 천안함 생존 장병 58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으면서도 정부와 군, 사회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위로와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겐 이용당했고, 진보세력에겐 외면당했다. 군대는 이들에게 ‘영웅’이라는 허울 좋은 칭호를 붙여줬지만 뒤로는 ‘패잔병’으로 대우했다. 사회적 낙인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직업군인으로 버텨보려 했으나 결국 옷을 벗어야 했던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의 삶을 견디기 힘들어 떠난 사람도 있다.

상처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한겨레21>과 <한겨레>,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팀(김승섭, 윤재홍)은 6월5일부터 21일까지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 조사’(천안함 조사)를 했다. 생존자 중 전역자(32명)를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는 총 24명이 참여했다. 그 가운데 8명을 최소 3시간 이상 심층 인터뷰했다. 언론과 연구진이 정부기관의 도움 없이 직접 천안함 생존 장병의 건강 실태 등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미군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발병률보다 6.7배나 높았다. 기나긴 진실 공방 속에 휘발된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정부와 군, 우리 사회가 뭘 했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2010년 3월26일 밤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천안함 폭침. 승조원(선원) 104명 중 58명 구조, 46명 사망.

최광수 병장은 두 동강 난 배에서 삶의 편에 있었다. 배의 앞쪽(함수)은 뜨고 뒤쪽(함미)은 가라앉아 생과 사가 우연처럼 갈린 그때, 그는 앞쪽에 있었다. 앞도 뒤보다 그리 낫지 않았다. 차가운 바다보다 더 차가운 삶이 이어졌다.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지만 보상이나 치료비 지원은 없었다. 2012년 1월1일 그는 한국을 떠났다. 기약 없이 떠났고, 돌아올 생각은 없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엘리베이터 등 밀폐 공간에 있기 힘들어한다. 해마다 2~3월 무렵이면 악몽과 불면증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3030일’ 어느 하루라도 천안함 생각을 안 해본 적이 없다.

<한겨레21>은 천안함 생존자 최광수(30)씨의 지난 8년을 재구성했다. 한 사람의 시간과 경험을 따라가다보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키지 못하는 응어리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난 3월부터 전자우편과 메신저 프로그램, 영상통화로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사는 그는 한국과 프랑스가 대형 참사의 생존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느낀 차이점을 말했다. 그리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양심선언하라’는 꼬리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광수씨는 20살에 수병이 배를 타는 줄도 모르고 해군에 입대했다. 배는 장교와 부사관만 타고 병사는 육상 근무를 하는 줄 알았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어학병으로 뽑혀 배를 탈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1200t급 초계(경계)함인 천안함이라는 큰 배를. 서해에서 작전구역 깊숙이 다가오는 중국 어선에 통신망으로 “중궈샹촨, 워쓰 한궈하이준(중국상선, 우리는 한국 해군)!”을 외치며 쫓아내는 일을 자주 맡았다. 배를 타고 3개월이 지나서야 멀미가 멈췄다. 그다음부턴 배가 집처럼 느껴졌다. 1년만 하고 육상 근무로 전환할 수도 있었는데, 자원해서 배에 남겠다고 했다.

“함장님, 함미가 없습니다!”

제대를 두 달 앞둔 추운 봄날이었다. 저녁 8시부터 밤 12시까지 당직 근무 일정이 잡혔다. 중국 어선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힘든 시간대였다. 장교에게 “나도 말년 병장인데 근무 좀 바꿔달라”고 졸랐다. “이번만 서라. 다음부터 바꿔줄게”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근무를 바꿨다면 지금 대전 현충원에 있을지 모른다. 근무가 아니었던 병사들은 주로 배의 뒤편에 있었다. 운동을 하거나 식당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침실에서 쉬는 시간이다. 그도 이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밤 9시22분. 광수씨는 배의 앞쪽 윗부분인 함교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타실(조종실)에서 타륜(타·운전대)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배 뒤 왼쪽에서 ‘쾅’ 소리가 나며 배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함교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오른쪽으로 쏟아져내렸다. 광수씨는 반대 방향으로 타를 돌렸지만 배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까진 배가 두 동강 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경기도 평택의 해군 제2함대사령부 내부에 전시된 천안함.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함교 오른쪽에서 바닷물이 차올랐다. 바깥으로 기어나와 다른 이들을 구조하는데 누군가 “함장님, 함미가 없습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배가 반 토막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구조보트를 타고 멀어지며 서서히 가라앉는 천안함 함수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아 “정말 없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져 12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온 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같은 기간 합동조사단에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밤샘 조사로 잠을 못 자 입술이 부르텄다. 조사관 중 해군이 없어서 일일이 배를 그려가며 설명해야 했다.

함께 살아오지 못했다는 죄책감

뉴스 방송 YTN을 통해 배를 건져올리고 주검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죽은 동료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유가족과 만나고 돌아온 그날, 쌓였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함께 살아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편으론 언론의 추궁을 받았다. 병원에 있을 때 기자들이 생존자 가족이라고 거짓말하고 들어와 인터뷰하려 했다. 경북 경주의 부모님 댁으로도 기자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한 번 인터뷰를 했는데 내용이 일부 왜곡돼 고생했다. 그다음부턴 인터뷰를 피했다.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인 2010년 5월22일 광수씨는 제대했다. “사회로 내팽개쳐진 느낌”이 들었다. 군과 정부는 사건 원인 조사로 바빠 생존자들을 사실상 방치했다. 정보기관이 생존자들을 철저히 관리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겠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차라리 군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군대에 남은 사람들도 지옥 같은 삶을 보냈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천안함 절단면.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누나 최정민(35)씨 집에서 머물렀다. 제대하고 1년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한다. 이때 일은 정민씨에게 물었다. 정민씨는 “동생이 거의 날마다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새벽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꿈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천안함 대원들과 한 명씩 악수하는데, 자세히 보니 죽은 사람들만 악수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악수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며 뜯어말렸다. 악몽은 밤마다 반복됐다. 폭침 당시로 돌아갔는데,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도 배는 침몰했다.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잤다. “동생이 침대에 누워 풀린 눈으로 온종일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봤어요. 새벽 4~5시까지 못 자고 혼자 중얼거려요. 천안함 이야기, 폭침 이야기, 죽은 친구들이랑 꿈 이야기…. 혼자 놔두면 쟤가 미칠 것 같아 옆을 지켰어요. 혼잣말하는 느낌이 안 들게 추임새도 넣고 질문도 하면서요. 상태가 심하면 수면제도 먹었고요.”

정민씨는 그때 동생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집이 무너질 거 같아 불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천안함은 광수씨가 2년 동안 먹고 자던 집이었다. “항상 뒤가 불안하대요. 자기가 있던 곳의 뒤쪽이 터진 거잖아요. 등 뒤에 빈 공간이 있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버스도 잘 못 탔고요.”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시달려

광수씨는 2018년 7월 현재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있다. 건물에 들어가거나 버스, 기차 등을 타면 탈출구부터 확인하고 소화기와 망치의 위치를 확인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매년 2월과 3월이면 불면증이 되살아나고 감정이 격해진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대형사고 등에서 심리적 충격을 받은 뒤 나타나는 정신질환으로 과민반응, 충격의 재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 증상이 있다.

다른 천안함 생존자들도 비슷하다. ‘천안함 조사’ 결과 2017년 한 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사람은 24명 중 11명(45.8%)이었다. 기간을 2010년부터 현재까지로 넓히면 21명(87.5%)이 진단과 치료를 받았다. 절대다수다.

정신적 상처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제대하기 전 어떤 행정관이 와서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안 와요. 보훈처 게시판에 글을 올렸죠. ‘천안함 생존 장병인데 보훈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냐’ 그랬더니 ‘전혀 지시사항이 없었고, 하려면 개인적으로 신청을 해라’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저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훈) 절차가 있을 줄 알았죠.”

광수씨는 2011년 4월과 7월 두 차례 국가유공자를 신청했다. 국가유공자 신청자는 우선 보훈지청을 통해 18가지 대상(순국선열, 애국지사, 전상군경 등)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심사받고, 이 중 상이(부상)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은 추가로 보훈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통지받는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면 매월 보훈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두 번 모두 떨어졌다. 1차 관문인 경주보훈지청 심사까지는 통과했다. 광수씨가 지청에서 받은 ‘국가유공자 요건심의 결과 통지’를 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증)을 전상군경 요건 해당 상이로 인정”한다고 적혀 있다. 지청이 전상군경으로 인정한 이유는 국군수도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발급한 진단서에 공통으로 광수씨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심각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서다. 통지서를 보면 “수도병원 경과기록지(10.4.7)상 정신과 전문의의 면담 결과 (중략) 앞으로 정신적 사고후유증의 가능성이 중등도로 판단되며 향후 중위험군의 추적관찰/치료계획”이라 적혀 있고 “진단서(연세대 세브란스병원, 10.9.27)상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진단되어 (중략) 향후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면담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2차 관문인 대구보훈병원의 상이 등급 구분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왜 탈락인지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신체검사 결과통지서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악몽, 불안 등)은 잔존하고 있으나 진단 기준을 만족하지 못함(등급 기준 미달)”이라는 짧은 글귀가 통보됐을 뿐이다.

최광수씨가 경주보훈지청으로부터 받은 신체검사 결과통지서. 최광수 제공

진단 기준이란 뭘까.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4조 3항에 따라 상이등급 구분표를 공개하고 있다. 신체 부위별 손상 정도에 따라 1~7급으로 등급을 매겨 지원 수준을 다르게 한다. 정신장애로는 최소한 “손쉬운 노무 외에는 종사할 수 없는 사람(6급1항)”이거나 “취업상 부분적으로 제한을 받는 사람(6급2항)”이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일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 상태여야 한다는 뜻이다.

광수씨처럼 군 경험으로 인해 악몽을 꾸고 불안해하며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있더라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베트남 파병, 1·2차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등 참전 군인이 끔찍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으면서도 오랫동안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를 과거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천안함 생존자 58명 중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6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3명은 몸을 심하게 다쳤다. 정신질환으로만 인정된 사람은 3명뿐이다.

정신질환 국가유공자 인정 3명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광수씨에게 “보상금 얼마 받았냐”고 물었다. 이명박 정부는 사망자들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주며 ‘46용사’라는 칭호를 붙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웅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정부에서 천안함 생존자들도 당연히 보상받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혀 없었어요. 정신과 상담치료도 제 돈으로 했는데요.” 광수씨뿐 아니라 <한겨레21>과 <한겨레>가 직접 만난 생존자 8명은 “보상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오히려 “뭘 해줬냐”고 되물었다. 광수씨는 “보수 정부나 보수 언론·단체는 천안함 생존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천안함 생존자에겐 심리적 상처뿐 아니라 사회적 낙인도 뒤따랐다. 사건 원인을 둘러싸고 연일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국민 절반이 ‘북한 어뢰에 의한 피격’이라는 합동조사단의 공식 발표를 믿지 않았다. 진보 성향인 사람들의 불신 비율이 높았다. 진보 성향인 정민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상처가 컸다. 정민씨는 사고 바로 다음 날 동생의 상태를 보고, 또 그의 말을 듣고서 당연히 폭침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위의 시선은 영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동안 거짓말한 게 있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불신이 정부와 군을 넘어 천안함 생존자한테까지 전가된 거예요. 이 사람들도 피해자인데, 인권 측면에서 바라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2010년부터 2011년까지 광수씨는 집 안에 갇혀버렸다. “어딜 가나 천안함 이야기라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언론과 여론이 우리를 집 속에 가둬버렸죠.” 가상공간인 온라인조차 함부로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패잔병’ ‘양심선언하라’는 댓글이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광수씨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건 2011년 여름이다.

프랑스까지 쫓아온 꼬리표

그해 마지막 해가 저물던 날, 온 가족이 인천공항으로 나가 배웅했다. 섭섭함은 별로 없었다. 홀가분함과 기대감이 더 컸다. 프랑스로 결정한 건 예술을 공부하기 좋으면서도 유학 비용이 쌌기 때문이다.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2013년 프랑스 파리1대학 팡테옹 소르본대학에 예술사 전공으로 입학했다.

꼬리표는 프랑스까지 집요하게 따라왔다. 파리에 막 도착해 그곳에 살던 아버지 지인을 만났다. 타국 생활에 도움을 받으러 갔던 건데 술이 한 순배 돌자 “숨기는 게 있지 않냐, 천안함은 사실 좌초했는데 조작한 거 아니냐”며 추궁했다. 단호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라고 잘랐다.

아버지 지인은 한국의 한 언론인에게 이를 이야기했고, 그 언론인은 나름의 각색을 거쳐 “해외 유학 중인 천안함 승조원이 정부의 발표가 사실이 아니라고 실토했다. 곧 양심선언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방송에서 여러 차례 주장했다.

“처음엔 고소하려고 했어요. 해외에 있는 천안함 생존병이 저 말고 또 누가 있나요. 그 사람은 제게 연락해 사실 확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그에게 공감해준 건 프랑스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이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병사를 외면한 한국 정부에 같이 화를 냈고, 파리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가 가능한 병원 목록을 뽑아줬다.

프랑스는 대형 사고 대처가 한국과 달랐다. 2013년 7월12일 파리 남부에서 테제베(고속철도)가 탈선해 7명이 죽고 192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사고가 나자마자 ‘정부에서 심리상담가를 보내 유가족과 생존자들 심리상담을 시작한다’는 뉴스 속보가 떴다. 뒤이어 프랑스 테러참사피해단체연합(FENVAC)이 이들과 연대하러 왔다. 광수씨는 뉴스를 보며 충격이 컸다. “한국은 사고가 나면 당장 원인을 밝히는 데 집중하잖아요. 프랑스는 일단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부터 시작하더라고요.”

최광수씨는 지난 4월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집회에 참석했다. 이용미(416 파리연대) 제공

올해 4월15일, 광수씨는 파리 리퍼블릭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4주기 추모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천안함이나 세월호나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해난 사고 뒤 정부가 잘못 대처해 피해가 커졌고, 끈끈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던 동료를 잃은 피해자들의 상처가 컸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원인이 뭐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추모집회에서 “그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직접 쓴 하얀 종이를 들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고, 그만큼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광수씨는 천안함 안에서 예술을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맞선임이자 미술 전공자였던 고 이상민 수병(1988년생)이 일과가 끝나는 대로 그림을 가르쳐줬다. 공책에 스케치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공책은 천안함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지만 인양 뒤 다시 찾았다. 개흙과 기름이 묻은 스케치는 지금도 스마트폰에 넣고 다니며 보고 있다. 광수씨는 다른 많은 천안함 생존자들과 달리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죽은 사람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무거운 부채감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가 천안함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 노희경 작가의 책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표지를 베껴 그렸다. 천안함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가 인양 뒤 되찾았다. 최광수 제공

천안함에 대해선 사람들에게 계속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다. 자신의 전공(현재 예술사 석사과정)을 살려 문화적 방식으로 말이다. 기자에게 털어놓은 몇 가지 구상 중엔 본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있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가도 해마다 2~3월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도 3월만 되면 주기적으로 천안함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정치색 없이, 그냥 우리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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