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99년 전 오늘, 일제가 '식민지배의 상징' 남산 신궁 건설을 공표하다

입력 2018.07.18. 14:19 수정 2018.07.2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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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 남산 신궁 이야기

[한겨레]

일제 강점기 남산 조선신궁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입학식이 끝나고 15일이 가까워오자 내 어린 가슴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소이다. 그날이 오면 남산에 올라가 조선신궁에다 대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되는 날이거든요.”

-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한겨레> 2009년 5월 19일 치

일본은 일제강점기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각 지역에 관폐대사(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신사)를 세웠다. 일본은 조선신사의 건립을 통해 영구적인 식민지 제국 통치가 무탈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이를 위한 수단에는 식민 통치를 받는 백성에 대한 ‘정신 세뇌’만큼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은 없었다.

‘일한신궁' 터로 지목됐던 서울 안암동 124의 당시 모습. 공사를 위해 깎아낸 언덕 너머로 북한산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일본의 잔인한 민족말살 정책은 이른바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이라는 교묘한 핑계 뒤에 숨어서 집행됐다. 1920년부터 일제가 세운 한반도 내 신사의 수가 1945년에는 모두 82개에 달했다. 면 단위의 작은 규모 신사도 1062곳이나 됐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학교나 가정까지 작은 신단을 만들어 참배하도록 강제했다. 조선의 국토와 백성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망가져 갔다.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은 일제강점기 조선 신궁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짚었다.

남산 한가운데 일본이 세운 ‘신궁’

남산 북서쪽 사면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조선신궁(현재 남산 식물원 일대)의 전경. <한겨레> 자료 사진.

오늘로부터 99년 전인 1919년 7월 18일, 일본은 남산의 조선신궁(1925년 6월 27일에 개칭) 창립을 공표했다. 가장 높은 사격을 가진 신사인 ‘신궁’의 자리로 경성(서울)의 남산을 낙점한 것이다.

일제는 1920년 본격적인 조선신궁 건설 착공을 시작해 1925년까지 5년여의 공사 기간 끝에 이를 완공한다. 총 43만 평(약 142만4000㎡) 남산 부지에 수백개의 돌계단과 함께 무려 15개의 건물을 꽂아 넣었다. 조선신궁이 완공된 직후 나온 잡지 기사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완공 직후의 경성역(서울역) 내부 플랫폼과 화물창고 모습. 왼쪽 멀리 남산에 일제가 만든 남산신궁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신축의 경성(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들어서노라면 우변 남산성지에 신작로가 통하고 우문이 있고 석계가 있고 올라가서는 한양공원 터에 대소 건물이 굉장히 놓였나니 이것이 조선신궁이라는 것이다. 총공비 2,064,800원의 국고금으로 전후 5개년 4월에 준공되어 (중략) 까닥하면 불경죄에 걸리는 이렇게 존엄 차 무서운 곳이다.

- <개벽> 제64호 1925년 12월 1일 치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은 1925년 12월 1일 ‘경성은 일 년 간 얼마나 변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잡지를 보면, 일본이 한양공원 터(현재의 남산공원)에 건설한 조선 신궁으로 인해 남산 전역이 일본적 색채가 농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경성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신궁이 식민지배 아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상징물이 되었다는 것도 역시 알 수 있다.

이 상쾌한 청신한 바람과 조망이 조흔 곳을 구하려면 반듯이 올라오기까지의 고난을 지나야 된다는 수도자의 고행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원한 터에, 노송도 정자도 벗나무도 모두 자취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신궁건축의 공사가 벌어져서 흙차가 (중략) 이곳 저곳에는 다듬지 아니한 석재가 쌓여 있어서 정서도 흥취도 피난해 도망간지 오래였다. 한양공원은, 공원으로의 생명은 죽은 후였다.

- <개벽> 제26호 1922년 8월 1일 치

남산 조선신궁과 층계. 앞쪽 긴 건물은 서울역(경성역). <한겨레> 자료 사진.

게다가 일본의 조선신궁 건립으로 인해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던 한양 도성이 크게 훼손됐다. 태조가 만든 사당인 국사당 등 본래의 시설물들도 잇달아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했다. 일본이 자신들의 건국신으로 일컬어지는 천조대신과 메이지천황을 제신으로 삼는 신궁을 들이는 동안 남산은 위용을 잃고 황폐해져 갔다.

조선인 신사 참배 강제

일본은 애초 조선신궁의 후보지로 ‘남산’과 경복궁 뒤 ‘북악산’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선정했다. 2곳 모두 배면에 산을 등지고 지대가 넓고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북악산은 남향의 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후보지에서 탈락했다. 남산이 일본인 이주의 근거지 인근에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북악산은 신궁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결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궁 건설 구상 때부터 조선인들의 강제참배도 염두에 뒀다.

남산의 조선신궁을 향하던 384계단. <한겨레> 자료 사진.

1925년 6월 27일 일제는 ‘조선신사’를 ‘조선신궁’으로 개칭해 매년 10월 17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도 강제로 이곳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신궁 건립 이전의 신사가 대체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조선신궁 건립 이후 신사는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한 동화의 장치로 활용됐다.

일본은 인격신 천황제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동화주의’의 구현을 이루고자 했다. ‘주민의 동화’는 신도 신앙을 공통분모로 삼아 신사참배를 하는 일본인과 그렇지 않은 조선인의 차이를 허물게 했다.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천황제 제국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당시 종합 잡지인 <조광> 1942년 8월호에 실린 조선신궁 참배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실제 일본 총독부의 ‘동화주의’ 정책은 신궁 건립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일본은 조선신궁의 건설 준비가 한창이던 1915년을 계기로 일반 신사에 대한 정비 및 종교에 대한 규칙도 완비했다. 이후 ‘동화주의’ 정책은 1932년 ‘정신교화’ 운동의 강화로, 1935년부터는 ‘심전개발’ 운동으로 구체화하여 나타났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경복궁 안마당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왕조를 우롱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 8도에서 모여든 박람회 관광객에게 개화한 경성의 근대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인 이 지도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와 남산의 조선신궁은 강조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서대문형무소는 나와 있지조차 않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총독부는 종교계 전반에 대한 탄압, 신사의 설립과 신사 신앙의 적극 장려,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정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에는 신사와 신궁의 설립이 크게 늘어나고 신사에서 주관하는 행사와 신사 참배자 수도 급증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신사체제의 강화는 주민 일상생활에서 국가 신도의 의례적 실천에 대한 강요로도 이어졌다. 신사참배는 대개 집단적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학생들이 주요한 동원 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 중학생이던 재일 통일운동가인 정경모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이 왔소이다. 배속장교 우두머리가 교장 이하 전 교원과 천여명의 전교생을 인솔하고, 나팔을 불면서 남산 꼭대기로 행진해 가지 않겠소이까. 드디어 전원이 신궁 앞에 정렬하고 늘어서자 “사이코케리레이”(최고의 예우 경례) 구령이 떨어지더군요. 만일 절을 안 한다면 그땐 나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 모두가 잡혀 들어가는 판 아니겠소이까. 무섭습디다. 정말 무서웠어요. 얼떨결에 자세가 무너지면서 허리를 굽혔소이다. 그 순간 어린 소년의 넋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지요.

-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한겨레> 2009년 5월 19일 치

일제 말기 조선신궁 참배는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는데, 특히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시로 단체 참배가 강제되기도 했다.

일본, ‘스스로’ 신사를 허물다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서울 한양도성 회현자락 부지내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 설명회에서 연구진이 조선신궁의 여러 건물 중 가장 큰 '배전'의 콘크리트 기초와 기둥자리 등과 옛 성곽 자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탈색하기 위해 1920년 지었으며 조선총독부, 통감관저, 일본공사관, 헌병사령부의 중심점 역할을 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나서 사라졌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남산의 조선신궁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 파괴된다. 특이한 점은 일본인 스스로 신사를 해체, 소각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성한 신을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원칙을 잊지 않고 집행했다. 8월 16일부터 시작된 조선신궁 해체 작업은 약 2달여의 작업을 거쳐 10월 6일 모두 마무리됐다. 일본은 신궁 내 각종 신물 등은 일본으로 보내고, 남은 시설은 소각했다.

당시 남산의 조선신궁이 아닌 지방의 신사로 쓰이던 곳들도 모두 조선인들에 의해 철거됐다. 해방 직후 파괴된 신사 및 신궁의 건수는 모두 136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행정관청에 대한 습격보다도 많았고, 경찰관서에 대한 습격 건수인 149건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강한 적개심을 갖는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1년 해방 후 조선신궁이 헐린 자리에 남산 식물원, 동물원, 분수대 등이 조성됐다. 분수대 앞에 선 가족의 모습 뒤로 지금은 서울시교육연구원으로 바뀐 '어린이회관'과 옛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보인다. 1970년 한옥으로 지었던 기념관은 2010년 현대식 건물로 새로 단장해 재개관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후 1970년 10월 남산의 옛 조선신궁의 자리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됐다. 일제의 국가신도의 성지에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을 앉힌 것도 일제의 강권통치 아래 피식민의 내면에 축적돼온 적개심과 반감 정서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당시 신사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제일 여고와 대구 달성공원 등에서 희미한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3권 >

<개벽 > 제 26호 1922년 8월 1일 치 , 제 64호 1925년 12월 1일 치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 정운현

<건축가 엄마와 함께 서울 옛길 느리게 걷기 > 최경숙

<서울육백년 2-남산 ·남산기슭 > 김영상

<신 서울기행 > 최준식

<식민지 동화주의의 공간정치 -조선신궁의 건설과 활용을 중심으로 > 김백영

<변화와 변용으로 본 근대기 서울 남산의 공원 > 박희성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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