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재기의 천년향기](13)에밀레..1000년을 넘어 마음을 울리는 소리엔 비밀이 있다

도재기 선임기자 2018. 7.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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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성덕대왕신종(神鍾)

보물, 걸작으로 평가받는 문화유산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대나 재료, 형태, 만든 기법은 달라도 하나같이 관람자의 오감을 자극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읽어내도 여전히 연구할 거리가 나온다. 풍성한 이야기도 쏟아진다. 그야말로 화수분이다. 이는 현대 미술품에도 적용된다. 회화든 조각이든 영상이든 명작은 다르다.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와 정신적 풍요로움을 안긴다.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크며, 통일신라시대인 771년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도 그렇다. 역사적·예술적·학술적 화수분이자 시공을 초월한 명품이다.

■ 한국의 고대 범종, 특별하다

‘성덕대왕신종’은 12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종에 1000여자의 명문이 남아 있어 제작 시기와 취지, 만든 사람들, 당시 정치·사회상도 보여준다. 명문과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성덕대왕신종은 771년에 제작됐다. 신라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다. 혜공왕은 종의 주인공인 성덕왕(재위 702~737)의 손자이자 경덕왕(재위 742~765)의 아들이다. 종 제작은 원래 성덕왕이 죽은 후 효성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경덕왕 대에 시작됐다.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면서다. 석굴암, 불국사도 바로 이 경덕왕 대의 작품이다. 하지만 경덕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러자 혜공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할아버지를 기리는 종을 완성한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당시 봉덕사에 내걸려 불교 의식구로 사용된 범종(梵鐘)이다.

국내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종은 통일신라시대 범종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종은 오대산 상원사의 ‘상원사 동종’(국보 36호)이다. 성덕대왕신종보다 40여년 앞선 725년에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6세기에도 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들어 특히 많이 제작된 종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 종들 가운데 성덕대왕신종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가장 크다. 입구 지름이 223㎝, 전체 높이 369㎝, 무게는 무려 18.9t에 이른다. 두께는 11~25㎝다. 종 앞에 서면 그 웅장함에 압도된다. 1200여년 전에 이 거대한 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거대한 도가니, 1000도가 넘는 고온을 유지할 시설, 엄청난 양의 밀랍, 장인들….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면 종은 새롭게 다가온다.

종의 재료는 합금기술이 적용된 청동이다. 구리와 주석이 약 8 대 2 비율이며, 납과 아연 등도 조금 포함됐다. 제작기법은 밀랍을 활용한 밀랍주조법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까다로운 첨단기법이었다. 그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287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등 삼국·고려시대 명품들이 이 기법으로 주조됐다.

한국 고대의 종에만 있는 특별장치인 음관과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

통일신라 혜공왕 때 완성된 걸작…크기·조형미 뛰어나 종소리 은은하게 유지하는 음관, 고유의 소리 외에 잡소리 줄여줘

조형적 아름다움도 자랑이다. 누가 봐도 당시 중국, 일본 종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꼭대기의 용뉴(종을 매다는 용모양의 고리)부터 맨 아래 종 입구까지의 형태, 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무늬가 섬세하다. 한 마리의 용을 형상화한 용뉴의 용은 세밀하게 새겨진 비늘, 날카로운 이빨, 생동감 넘치는 발 등으로 역동적이다.

용의 목 뒤에는 꽃무늬가 돋을새김된 대나무 모양 장식물이 있다. 종소리를 더 은은하게 유지하는 과학적 장치인 음관(음통)이다. 음관은 중국·일본 종에는 없다. 성덕대왕신종, 나아가 한반도 고대 종에만 유일하게 있는 특별한 장치다. 종 몸체 윗부분과 아래 입구에는 둥글게 띠가 둘러졌는데, 띠 속에도 고대 장식무늬인 식물덩굴무늬(당초문)가 꽃들과 어우러져 있다.

아름답기로 이름난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몸체에서 눈길을 확 잡는 것이 있으니, 하늘을 날고 있는 인물상인 비천상이다.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여러 비천상들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선녀 같은 인물이 연꽃무늬 방석에 무릎 꿇고 앉아 활짝 핀 연꽃 모양의 향로를 받쳐든 모습이다. 돋을새김된 꽃무늬가 마치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인물을 감싸고, 천의(天衣)가 휘날린다. 다른 종들의 비천상은 대부분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지만 이 종의 비천상은 공양모습을 형상화한 공양비천상이다.

몸체에는 타종 지점(당좌)과 명문도 있다. 학술적 측면에선 당대 기록된 1차 사료이자 금석문인 1000여자의 명문이 소중하다. 명문 내용을 통해 성덕왕에서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당대 정치사와 사상사, 공예사, 서예사 등을 연구할 수 있다.

타종 순간부터 나타나는 50여개 진동음…종 몸체의 미세한 비대칭성 때문 종 내부에 덧대어진 크고 작은 철덩어리들도 소리와 관련된 듯

■ 신비로운 종소리의 미학

‘그 형상은 산이 높이 솟은 듯하다. 소리는 용의 소리와 같았다. 위로는 하늘 꼭대기를 꿰뚫고 아래로는 땅 밑바닥까지 통했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은 종이 완성된 직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이 국내외적으로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가장 큰 요인은 종소리 때문이다. 어떤 종보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은은하고 길게 울려퍼지는 것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음은 가슴을 파고든다. 심금을 울린다는 상투적 표현이 적확하다. 그동안 여러 종소리와의 선호도 비교조사에서도 압도적 1등을 차지했다.

에밀레종 설화가 만들어진 것도 종 제작의 어려움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종소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넣어 종소리가 마치 아이가 애절하게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평가는 곧 종소리의 신비로움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한때 성덕대왕신종에 실제 아이가 들어간 듯 사람 뼈 성분인 인이 포함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실제 조사결과 인 성분은 없었다.

성덕대왕신종 소리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동안 음향학을 비롯, 갖가지 과학적 분석이 이뤄졌다. 관련 논문이 국제학술지에 실리기도 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요약하면,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순간부터 저마다 각자의 소리를 내는 50여개의 진동음이 나타난다. 이 진동음의 개수가 일반 종들보다 많다. 저음이 끝까지 유지되는 와중에 종소리의 핵심인 맥놀이 현상이 벌어진다. 맥놀이는 2개 이상의 음파가 어우러졌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맥박처럼 사라지는 듯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맥놀이로 종소리는 풍부해지며 그 여운도 길어진다. 그럼 맥놀이는 어떻게 일어날까. 50여개의 다른 떨림, 진동음을 만들어내는 종 몸체의 미세한 비대칭성 때문이다. 사실 몸체 곳곳의 두께는 미세한 차이가 있고, 재료 물질의 밀도도 다르다. 표면에 있는 각종 무늬나 조각들도 마찬가지다. 특이한 것은 성덕대왕신종 내부에 크고 작은 철덩어리들이 덧대어 있다는 것이다. 이 덩어리들도 비대칭성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종에만 있는 음관도 종소리 비밀 중의 하나다. 성덕대왕신종 음관은 종에 붙은 쪽 지름이 82㎜, 바깥쪽 지름이 148㎜로 나팔 모양이다. 이 음관으로 나오는 소리의 분석결과가 흥미롭다. 음관은 종소리의 핵심이자 고유 성분인 진동수 64㎐(헤르츠)와 168㎐는 종 내부로 돌려보내는 반면 300㎐ 이상은 밖으로 흘려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유의 소리 외의 잡소리는 줄인다는 의미다.

종 아래 움푹 팬 구덩이인 울림통(명동)도 소리에 영향을 미친다. 실험결과 울림통은 종소리와 공명을 일으키는 장치이자 소리를 더 길게 만든다. 울림통의 깊이, 크기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현재 성덕대왕신종 아래 울림통은 그 크기를 더 키워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덕대왕신종의 제작 시기와 취지 등이 기록된 명문.

성덕대왕신종은 빼어난 조형미와 더불어 종이 지녀야 할 아름다운 종소리까지 갖췄다.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특성도 지녔다. 사실 한국의 고대 범종은 이미 국제적으로는 ‘Korean Bell’(한국 종)이란 고유한 학명까지 부여받을 정도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우수성은 이미 고려시대에 일본에까지 퍼졌다. 현재 일본에는 한국 범종이 50여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통일신라시대 범종도 4점 안팎으로 집계된다. 대부분 고려시대에 약탈 등을 통해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 통일신라시대 범종 중 후쿠이현 조구신사(常宮神社)에 소장된 연지사(蓮池寺) 종은 833년 제작된 것으로 일본의 국보이기도 하다. 지금의 경남 진주 연지사라는 절에 있었던 것으로, 진주 시민단체들이 환수 대상으로 지목한 문화재다.

■ ‘에밀레종’과 제임스 터렐

성덕대왕신종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 안타깝게도 종소리는 2003년 개천절 이후 직접 들을 수 없다. 다른 종들과 달리 훼손된 것은 아니지만 보존을 위해 타종을 중단했다. 다만 경주박물관은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며,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리를 다운받을 수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성덕대왕신종을 지금처럼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공간조성 등을 통해 활용성을 더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종소리와 조형미를 현대적으로 활용할 만큼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니 세계에 더 자랑스럽게 내놓자는 것이다. 사실 종소리는 최근 다양하게 활용된다. 정신적·육체적 안정과 휴식을 위한 명상의 도구로 쓰이는 게 대표적이다. 오묘한 울림의 종소리가 팍팍하고도 파편화된 삶을 치유하는 힐링 수단인 셈이다.

필자는 성덕대왕신종을 만나고 그 소리를 들으면 얄궂게도 미국의 현대미술가 제임스 터렐(75)의 작품이 떠오른다. ‘빛과 공간의 마술사’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빛과 공간을 활용해 무뎌진 오감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는 특별한 감동을 안긴다(강원 원주시 오크밸리 내 미술관 ‘뮤지엄 산’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터렐의 빛처럼 성덕대왕신종의 신비로운 소리가 특별한 공간을 만나 더 진한 감동을 안기는 방안은 없을까. ‘소리와 공간의 마술사’라 할 한국 현대미술가를 기다려 본다.

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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