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제조업 한다는 자부심 다 잃었다, 이 땅서 더는 못버텨"

성호철 기자 입력 2018.07.23.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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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자리 잃는 기업가 정신] [上] 제조업의 한국 탈출
中企의 호소 "이대론 한국서 제조업 안될게 뻔해, 가족도 말려
최저임금·주52시간 압박에 진짜 탈출은 내년부터 시작될 것"

지난 20일 경기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중소 모터 제조업체 태화의 권동철(61) 사장은 "10년 전쯤 기회가 있었을 때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태화는 한때 매출 110억원을 올리며 '우수 중소기업 지정'(중소기업은행), '우수중소기업인상'(중기청)을 수상한 강소(强小) 기업이었다. 모터 핵심 부품인 고정자·회전자 제조에서만큼은 국내 최고 기술력을 보유했다. 깐깐한 삼성전기에도 납품했다. 권 사장은 바늘처럼 생긴 부품 하나를 들더니 "이게 모터의 고정자"라며 "모터가 회전할 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게 조금이라도 휘면 모터는 불량품이 된다"고 말했다.

"느는건 빚과 한숨뿐" - 지난 20일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중소 제조업체 태화의 공장에서 권동철 사장이 작업복을 입은 채 모터 제작 기계 앞에 서 있다. 권 사장은“인건비를 줄이려고 다시 작업복을 입고 기계를 돌리지만 열심히 해봐도 느는 것은 이익이 아닌 빚”이라고 말했다. 그는“10여년 전에 중국으로 공장 이전할 기회가 있을 때 나갔어야 했는데 한국에 남았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권 사장은 "2005년 주거래 업체가 함께 중국으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며 "제조업이 한국의 힘이라는 자부심도 셌고, 인건비만 보고 중국에 갈 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신제품으로 승부를 보자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떠나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2010년 무렵부터 값싼 중국산이 밀려 들어오고, 한국 내 생산 원가는 계속 오르기만 했다. 작년 매출은 25억원으로 급락했다. 권 대표는 "한때 25명이었던 직원은 지금은 5명만 남았다"며 "올 초 15년 근속한 직원이 나가는데 돈이 없어서 빚을 내 퇴직금을 지불했다"고 했다. 그는 "오너 갑질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위축됐고 한국에서 중기 사장을 한다는 자부심도 다 없어졌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가동을 멈춘 기계를 헝겊으로 닦다가 "올해 곧 결혼하는 딸이 '아빠는 할 만큼 했어요. 그만 해요'라고 말하더군요"라고 했다.

한국땅에서 사라지는 제조업 도전정신

국내 산업 현장에서 '한국에서 제조업은 한계를 맞았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중소기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을 밀어붙인 데 대해 중소기업인들은 '더 늦기 전에 한국을 떠나야 할 때'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진짜 '한국 엑소더스(대탈출)'는 내년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내년 1월 최저임금 8350원이 시행되는 데다 2020년 1월부터는 직원 수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도 근로 시간 단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자동차 부품 업체 Y사는 2년 전부터 중국·인도·헝가리 등지에 4개의 해외 신규 공장을 연이어 지었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 추가 공장을 짓기 위해 부지를 알아보고 있다. 이 회사는 20여년 전 창업 이후로 줄곧 한국 공장을 고집한 수출 제조 업체였다. 최근 4년 동안 매출이 290억원에서 830억원으로 증가할 정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박모 대표는 "한국 내 노동 환경이 기업에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한국에서 (제조업이) 안될 게 뻔히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공장의 직원 80여명은 해고하지 않지만 인원 보충하지 않고 자연 감소로 내버려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천에 있는 금형 업체 D사는 최근 태국에 공장 부지를 구매했다. 이 회사의 강모 대표는 "한국에서는 젊은 신입사원을 구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이제 근로 시간까지 단축되면 공장을 제대로 돌리기 힘들다"며 "지금 태국에서 직원을 고용해 잘만 가르치면 1~2년 후 제대로 물량을 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부심 잃고 위축된 기업인들

국내 제조업 현장에서는 경영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대책을 못 내놓는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20여명의 사장들은 "아무리 우리가 떠들어봐야 정부는 꼼짝도 안 한다. 조용히 있다가 해외로 나가든가 그냥 문 닫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1년 전 만났던 한 중견기업의 관계자는 "해외 이전을 추진하는 기업 사례로 신문에 나온 뒤 정부 부처로 불려가 경고받았고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세무조사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해외 공장 이전으로 중소기업의 고용이 흔들리면 국내 전체 고용 환경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국내 전체 근로자 가운데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87%(1311만명)로 미국(41.33%)·일본(52.8%)·영국(53.08%)·프랑스(63.3%) 등 주요 국가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중소기업의 한 대표는 "한계 기업은 문을 닫고 자금 여력 있는 기업들은 다들 해외로 나가면 한국의 젊은이들은 누가 고용하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