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의 軍]"이게 군대냐"..긴장 풀린 軍, 기강과 명예는 어디 갔나
촛불혁명으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이게 나라냐”는 외침은 “이게 군대냐”로 바뀌고 있다. 군은 북한이 도발할 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며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올해 들어 남북, 북미 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완화되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군 내 사건사고와 맞물려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 파문으로 흔들리던 군은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방부 수장의 발언을 현역 육군 대령이 반박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방부 장관과 현역 군인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진실공방을 벌이는 모습에 국민들은 당혹해했고, 군인들은 자괴감에 빠졌다.
◆軍, 긴장 풀렸나…기강 문제 논란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에서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가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늑대와 싸우기 위해 똘똘 뭉친다.
군 조직도 마찬가지다. 적의 존재와 위협이 크면 이에 맞서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데 그 적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위협이 크게 약화되면 군의 기강이 흔들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의 경우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자 강도, 약탈, 성희롱 등의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군에서도 남북 화해 분위기가 고조되고 군축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군 고위장성들의 일탈이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군은 그동안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군인은 패가망신토록 엄벌에 처하겠다고 공언해왔으나 이달 들어 발생한 성폭력 사건으로 공염불이 됐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육군은 24일 “23일 한 여군으로부터 ‘A소장에게서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당했다’는 신고를 접수, 육군 중앙수사단에서 수사 중”이라며 같은날 오후 A소장을 보직해임했다. 육군본부 직할부대 지휘관이었던 A소장은 지난 21일 자신의 관사에서 외부단체 초청 행사를 개최한 뒤 행사 진행을 도운 피해 여군에게 “고생했다”며 포옹하고 볼에 입을 맞춘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 여군은 성추행 사실을 지난 23일 소속 부대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지난 9일 모 부대 사단장이었던 B준장을 부하 여군 성추행 혐의로 보직해임했다. B준장은 지난 3월 부하 여군과 둘이서 식사를 한 뒤 부대로 복귀하던 중 피해 여군에게 손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뒤 손을 만진 것으로 군 당국의 조사 결과 드러났다. 사무실과 차량에서 다른 부하 여군을 성추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 3일에는 해군 C준장이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부하 여군과 술을 마신 뒤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진급이나 보직에 대한 불이익 등을 우려해 신고하지 않은 사례를 감안하면 군 내 장성들의 성폭력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명사고도 빈발하고 있다. 2014년 윤일병 폭행사망사건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말이 군 안팎에서 나올 정도다. 지난 17일에는 경북 포항에서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이 추락해 탑승한 해병대 장병 6명 중 5명이 숨졌다. 지난달 19일에는 경남 통영 인근 해상을 항해하던 초계함 마산함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1명이 사망했다. 같은달 22일에는 백령도에서 해병대 하사가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지난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군의 상명하복 원칙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국방부를 담당하는 100기무부대장 민병삼 육군 대령은 “장관이 9일 오전 간담회에서 ‘내가 법조계에 문의해 보니 문제될 게 없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직권남용에 해당되는지 검토해 보라’고 했다”며 “36년째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의 명예와 양심을 걸고 답변한다”고 말했다. 송 장관이 “완벽한 거짓말”이라며 반박하자 “당시 간담회 내용을 담은 문서는 운영과장이 PC에 쳐서 기무사에 보고했다. 그 내용이 다 있다”고 재반박했다.
기무사는 25일 국회 국방위에 관련 문건을 제출했다. ‘장관 주재 간담회 동정’이란 제목의 문건에는 송 장관이 ‘위수령은 잘못된 것이 아님. 법조계에 문의하니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계획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함’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방부는 “사실이 아닌 것을 첩보사항처럼 보고하는 행태는 기무개혁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하는 증거”라고 비난했다.
파문을 수습해야 할 송 장관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군심(軍心)이 동요할 조짐을 보이자 문 대통령이 나섰다. 문 대통령은 26일 “문제의 본질은 계엄령 문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기무사 개혁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며 “송 장관을 비롯한 계엄령 문건 보고 경위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세월호 유족 사찰과 계엄령 검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구시대적이고 불법적인 일탈 행위”라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는 기무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 안팎에서는 성폭력과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 파문이 들불처럼 번진 것에 대해 국방 수장인 송 장관의 책임이 있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고조되면 군 조직 내 긴장이 이완되면서 부적절한 언행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훈련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고가 발생할 위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평화병’이다. 평화병은 군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암적 존재다.
남북 관계가 급속히 회복되면서 군의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국방부는 4.27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눈에 띄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5월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1차 확대회의를 열어 당의 유일적 영군 체계와 군사훈련 강화를 강조하고, 총정치국과 인민무력성에서 일선부대에 장병 정신교육 등을 실시토록 지시하는 등 ‘군 다잡기’를 한 것과 대조적이다. 장군들의 성폭력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른 이달 4일에야 공직기강 긴급회의를 개최한 송 장관의 조치에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송 장관은 27일 국방개혁 2.0 브리핑에서 “저는 ‘장관 자리에 연연한다’ 이런 것은 없다. 국방개혁을 성공시키고 기무사 개혁도 성공시키는 데 제 소임을 다할 뿐이다”라고 밝혔다. 그 말처럼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이외에는 군을 수습할 방법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공룡같은 군대를 표범처럼 날쌘 군대로 만들겠다”는 지난해 7월 장관 취임 당시의 초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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