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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부터 반발 부닥친 '미군 위안부 조례'

입력 2018. 08. 03. 05:06 수정 2018. 08. 03.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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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기지촌 할머니 120여명
가족한테도 버림받아 빈곤생활

"한때 달러벌이 역군, 이젠 돌봐야"
경기도의회·평택시 지원조례 추진
"성매매 여성이 왜 위안부냐"
일부 상인 등 반발에 토론회 파행

[한겨레]

기지촌 여성들이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성병)검진증. 중앙대 이나영 교수 발표 자료.

“언니들은 나라를 살리고 외화 획득을 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도 괜찮아요”

19살에 고향을 떠난 김아무개(73) 할머니는 1970년대 경기 평택 팽성읍 안정리에서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총무 일을 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지원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매매할 때 태도까지 세부적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 경찰서장은 “미군을 불쾌하게 하면 이적행위”라고 겁박하기도 했다. 미군 상대 외화벌이 시대가 지나가자 김 할머니는 다른 기지촌 여성들처럼 가족에게 절연당하고, 생계 불안에 시달리며 혼자 산다. 평택 미군 기지촌 지역에는 현재 120여명의 기지촌 할머니들이 남아 있다.

지난달 24일 평택시 기지촌 여성(미군위안부) 지원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토론회 모습. 평택시민재단 제공

지난달 24일 경기도 평택시 팽성국제교류센터에서 ‘평택시 미군 위안부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 제정을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렸다. 경기도 의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이 고령의 기지촌 여성들을 돕기 위해 추진하는 ‘미군 위안부 지원조례’가 미군기지 주변 상인들과 일부 주민들의 반발로 진통을 겪고 있다. 앞서 지난 3월 경기도 의회 더불어민주당 박이옥분 의원이 동료 의원 20여명의 서명을 받아 ‘경기도 미군 위안부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했으나, ‘조례의 근거가 될 상위법이 없다’는 경기도의 반대로 무산됐다.

평택시 조례안에서는 지방정부가 나서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명예 회복을 돕고 주거와 생활 안정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70~80대의 고령이 된 이들은 가족과 끊어진 경우가 많고, 지역사회에서도 차별과 소외를 겪어왔다.

경기도 조례안은 ‘국가가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성매매를 조장·방조·묵인했고, 그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이 강제 검진·구금·구타·인신 매매에 시달려 왔다’며 ‘미군 위안부 문제는 국가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최근 법원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국가의 기지촌 운영 관리 과정에서 성매매 정당화와 조장 행위, 위법한 강제 격리·수용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놓았다.

기지촌 여성들을 UN군 상대 위안부로 규정하는 정부 사업 내용이 담긴 당시 기사.중앙대 이나영 교수 발표 자료

하지만 반발의 목소리도 크다. 미 8군사령부가 있는 팽성읍 안정리 일대 상인과 일부 주민들은 “고통받는 이웃으로서 기지촌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조례에 나타난 ‘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만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4일 토론회서도 일부 상인과 주민들은 “일본군 위안부가 위안부지, 왜 미군을 상대한 당신들이 위안부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지난달 24일 평택시 기지촌 여성(미군위안부) 지원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토론회가 일부 참석자들의 반발로 파행됐다. 평택시민재단 제공

팽성읍 상인회 관계자는 “가난한 한국 여성들이 쪽잠 자며 가발공장 등에서 돈 벌 때 그들은 집에 텔레비전을 놓고 개인 식모까지 두고 미군을 상대로 매춘했다”고 강조했다. 자발적인 성매매 노동자이므로 강제성이 포함된 ‘위안부’라는 호칭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미군을 상대한 여성들이 미군 위안부라면 한국군을 상대한 성매매 여성은 국민 위안부냐. 미군과 우리를 이간질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또 “이들을 ‘미군 위안부’로 확정하면 미군 장병들이 기지 앞 술집 출입을 할 수 있겠냐”며 영업의 어려움을 걱정했다.

‘위안부’ 호칭을 싸고 진통을 겪던 인권조례는 이름을 바꿔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이은우 평택시민재단 이사장은 “지역 상인들의 반발 의견을 고려해 ‘기지촌 여성 지원 조례’로 명칭을 바꾸는 문제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일본군·미군·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위안부 문제 등을 연구해온 중앙대 이나영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처럼 미군 위안부도 국가가 동원하고 여성들이 인권 침해를 당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지만, 우선 이 조례가 제정되는 것이 중요하므로 명칭을 바꿔서라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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