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판사라는 엘리트 태도 버린지 오래"..20년간 '인문학 앓이' 판사의 성찰

김고금평 기자 2018. 8.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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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판으로 본 세계사' 낸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법전보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먼저"
판사 생활한지 10년째인 나이 40세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그는 이때부터 20년간 읽어온 인문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최근 '재판으로 본 세계사'를 펴냈다. /사진=김고금평 기자


판사의 일과를 들으면 따분하기 그지없다. 출근하자마자 혼자 판례 분석하다, 3조로 나뉜 점심시간에 맞춰 홀로 밥을 먹고 다시 독방(?)에서 연구하다 퇴근한다. 1주일에 한 번 재판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늘 ‘독방 신세’다. 최근 대법원의 무너진 신뢰로 사법부가 비난의 도마에 오르는 현실에서도 대부분 판사는 묵묵히 제 할 일만 좇는다.

‘제 할 일’은 법전 앞에서 오로지 판례를 분석하거나 맡은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박형남(58)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도 마찬가지. 그렇게 10년간 법전을 연구하던 그가 어느 날 문득 ‘실존주의’에 눈을 떴다.

“대학(서울대 법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역사책을 좋아했는데, 잊고 있다가 일을 좀 알게 된 10년 차인 40세 때 고미숙 작가의 ‘열하일기’을 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됐어요. 그 문장들이 제가 평소 보던 법서와 너무 다른, 활발하고 다채로워 심장이 뛰더라고요. 인문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제대로 결심한 계기였죠.”

사람들은 문학가가 사망했을 때 그의 소설을 평가하지만, 법률가는 그 사람의 부동산과 상속 문제를 ‘숙제’처럼 보기 쉽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법률가 10년 생활 뒤에 비로소 찾은 ‘의미’ 있는 인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제가 사라질 텐데, 남의 재판만 하고 사라지는 건 너무 억울하고 안타까웠어요. 게다가 법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는 법전의 껍데기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알맹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19세기 서양 역사에서도 판사는 인문학적 성찰을 하며 재판을 했는데, 20세기 들어 법이 세분화하고 어려워지면서 ‘법률’에만 의존하게 됐어요. 원래 판사의 모습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우선이어야 해요.”

그가 최근 낸 ‘재판으로 본 세계사’는 20년간 다져 온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판결 얘기를 다루지만 판결 그 자체보다 판결에 이르기까지 심리 과정, 사회적 배경, 용기 있는 결단 등 인문학적 시각들이 넘친다.

신념을 굽히지 않아 반역죄로 처형당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재판이나 영국의 무능하고 독재적인 찰스 1세의 참수 재판에선 우리가 어떤 각성으로 지금 사회의 민낯과 대면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박형남 부장판사. /사진=김고금평 기자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은 ‘드레퓌스 재판’, 미국이 오랜 인종차별 관행에 종지부를 찍은 ‘브라운 재판’도 역사에서 배우는 진보의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재판의 이면을 따라가면 인간과 사회를 고민하는 배경과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브라운 재판’에서 변호인단이 종전에 하지 않던 사회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법으로 강제된 인종분리정책이 백인과 흑인 모두에 부정적으로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인종차별주의는 전 세계에 만연했을 거예요. 재판부도 이런 인간과 사회의 인문학적 통찰을 판결 근거로 삼았고요.”

부동산 거래나 이혼 소송 같은 재판에서도 마지막 단계는 ‘예스 아니면 노’다. 결론은 흑백으로 재단하지만, 개인의 삶은 무지갯빛으로 다양하기에 그 속을 보려는 인문학적 통찰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부부가 살면서 수많은 사연과 곡절이 있는 것처럼 모든 개인의 삶에는 흑백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아요. 재판의 결론에는 차이가 없더라도 판사가 소송자와 공감하고 소송자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인문학적 성찰은 망자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차이를 구분해 판결하거나 자살을 개인의 일탈적 문제만으로 보지 않는 ‘너머의 시각’을 갖추는 데도 필요한 도구다. 노동자의 최대 노동시간을 법으로 규제하는 문제를 다룬 ‘로크너 재판’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위헌 결정’도 인문학적 통찰의 부재가 낳은 악수라는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계약의 자유’를 앞세워 노동시간 제도를 반대해 생긴 ‘로크너 재판’처럼 법리로만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요. 법전엔 왜 인간관계를 맺는지, 어떻게 세상을 봐야 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거든요.”

다양한 인문·역사적 통찰로 박 판사가 내린 의미 있는 판결도 다수다. ‘결혼 전 약속한 지참금 10억 원을 달라’며 처가 식구를 상대로 한 30대 의사의 지참금 소송 사건에선 양심과 염치없는 행위라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리보다 인문의 시각이 반영된 판결로, 그는 “이별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재판에 숨겨진 인문과 역사적 배경을 얘기할 때 목소리를 높이거나 진지해졌다. 그는 \


한 공무원의 자살 사건에선 혼자만의 일탈로 규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겪었을 스트레스, 왕따 같은 ‘심리적 부검’을 최초로 실시해 업무상 재해로 판결하기도 했다. 그는 판결의 과정이나 배경 없이 결론만 보고 사법부를 평가하는 세태가 아쉽다면서도, 한편으론 판사들의 자성도 촉구했다.

“젊은 판사들이 대개 모범생에다 집안 풍파 없이 ‘평생 법관’을 꿈꾸며 엘리트로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저도 젊었을 땐 ‘서울대 출신 판사’라는 자부심을 가진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일은 모두 일반인이 겪는 범죄들이에요. 실제 그 삶을 투영해야 하고, 평면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이에요. 제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유일하게 만나는 모임이 초등학교 동창회예요. 친구들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팍팍한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죠. 인문학적 성찰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는 재판보다 역사 얘기를 할 때 목소리가 커지고 눈이 동그라졌다. 법복까지 벗으니 영락없는 '인문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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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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