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위해 일했지만 결국 간첩으로 몰려"..영화 <공작> 실존인물 박채서씨 인터뷰

유설희 기자 2018. 8.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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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8일 개봉 ‘공작’ 실제 주인공 전 대북공작원 박채서씨
ㆍ북 보위부서 어머니 사진과 차명으로 산 땅 물어보며 협박
ㆍ김정일은 북에 잡아두려 중매도…이중간첩 몰려 6년 옥살이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한 고위층으로 잠입했던 국가안전기획부 특수공작원 박채서씨가 지난달 27일 경향신문사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오는 8일 개봉하는 영화 <공작>은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특수공작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1993년 안기부 대북 공작원으로 활약한 박채서씨(64)가 실존 모델이다.

흑금성의 존재는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이른바 북풍 공작 수사가 확대되면서 드러났다. 이후 2010년 그는 이중간첩으로 몰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정동에서 박채서씨를 만났다.

“대북공작원이 된 후 저는 남한의 남북합작광고회사인 아자커뮤니케이션에 전무로 위장취업했어요. 안기부는 그때부터 저를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죠. 당시 제게 주어진 임무는 북핵 정보를 빼오는 거였어요. 북한 고위관계자들을 만나 남북합작광고를 성사시키면서 장성택, 김영룡 등 북한 수뇌부의 신임을 얻었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데도 성공했고요.”

북한 수뇌부가 박씨를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아니다. 박씨는 북한 고려호텔 식당에서 김영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을 만났을 때 일을 들려줬다.

“고향 텃밭에서 일하는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머니 맞습니까?’ 묻는 거예요. 정보력을 과시하는 거죠. 가장 놀랐던 건 ‘박 선생, 부여에 사논 땅은 잘되고 있소’라고 물었을 때였어요. 차명으로 산 땅이었는데도 알고 물어본 거죠. 순간 등에 식은땀이 줄줄 나더라고요.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겁니다.”

그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1996년이다. 남북합작광고를 빌미로 남북을 오간 지 3년 만이다.

“리철 북한 무역성 담당 참사가 어느 날 제가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찾아와 ‘자지 말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날 밤 9시30분쯤 호텔 앞에 세워진 벤츠 차량을 타고 모처로 이동하자 김 위원장이 김영룡 부부장과 함께 나타났어요. 김 위원장 인상이오? 샤프했죠. 대화해보면 알잖아요. 같은 말을 되풀이 안 해요. 말을 쭉쭉쭉 명쾌하게 하고, 성격도 화끈해서 결단력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 위원장은 박씨의 광고사업에 대해 소상히 캐묻고는 대뜸 “박 선생, 통일이 만듭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영문을 몰라서 ‘당연히 통일해야죠’ 이렇게 답했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북한 아가씨하고 혼인해서 2세 ‘박통일’을 만들라는 말이었어요. 인질을 잡아놓으려고 했던 거죠. 평양외국어대 출신 엘리트였던 노영옥씨라고 평양예술대 학장의 외동딸이었어요. 30대 후반이라 흔들릴 법도 했지만 저 하나 믿고 시집온 집사람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박씨를 만난 것은 여동생 김경희가 관리하는 골동품 판매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의 골동품을 남한에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북풍 사건 여파로 신원이 노출되자 1998년 안기부에서 해고됐다. 북한 전역에서 찍으려던 삼성 애니콜 광고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에서 대북 비선으로 활동해왔다. 가수 이효리씨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씨가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한 2005년 삼성 애니콜 광고는 박씨가 기획한 남북협력사업 중 하나다.

하지만 박씨는 2010년 북한에 군 기밀정보를 넘긴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기소돼 징역 6년을 선고받으면서 ‘애국자’에서 ‘이중간첩’으로 운명이 바뀌었다.

“법으로 따지면 할말이 없어요. 간첩 활동 자체가 불법입니다. 북한 사람하고 밥먹고 전화만 해도 국보법 위반이고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자국의 비밀공작요원을 법정에 세워놓고 처벌한 전례가 없어요. 우리가 해외 공작을 했노라고 공식문서로 인정한 꼴이죠.”

2016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한 박씨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국가를 위해서 일했지만 그 결과 간첩이 됐다”면서 “남은 인생은 내 가족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고 했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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