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유해 보냈으니 종전선언 하라..우리만 움직이진 않아"

유지혜 2018. 8. 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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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외무상 ARF 연설
"미국에서 낡은 것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 표출"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기념촬영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북한이 종전선언 등 체제 안전 보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리트리트(비공식 자유 토론) 연설에서 “미국이 건설적인 방안을 갖고 나온다면 상응하게 무엇인가를 해줄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우리의 우려를 가셔줄 확고한 용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만 일방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ARF는 북한이 참석하는 유일한 역내 다자 안보협의체다.
북한 대표단은 이용호의 발언 직후 미디어 센터를 찾아 기자들에게 연설문을 배포했다. 일본 등 다른 나라 기자가 접근하자 북한 대표단 관계자는 한국 기자가 어디 있는지 찾은 뒤 "우리 외무상 동지가 발표한 성명이니 나눠보시라"며 연설문을 건넸다. 영문·국문본을 모두 갖고 있던 그는 "조선말(한국어)이 아무래도 편하시죠?"라며 국문본을 우선 주기도 했다.

이용호는 연설문에서 6·12 센토사 공동성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며 입장을 개진했다.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발굴 및 송환 등이다.

그는 “공동성명의 완전한 이행을 담보하는 근본 열쇠는 신뢰 조성”이라며 “신뢰 조성을 선행시키며 공동성명의 모든 조항들을 균형적으로, 동시적으로,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가는 새로운 방식만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도”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이 공동성명에서 셋째와 넷째 조항만 먼저 이행할 것을 주장하고 우리는 첫째와 둘째 조항만 먼저 이행할 것을 주장한다면 공동성명의 이행 자체가 난관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기존의 동시적·단계적 접근 원칙을 다시 강조한 것으로, 종전선언 등 체제 안전 보장과 비핵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공동성명의 균형적·동시적 이행을 주장한 것은 북한이 이미 유해송환 조치를 이행했으니 이제는 미국이 체제 안전 보장책을 내놓을 차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그는 “미국에서는 조선반도(한반도) 평화 보장의 초보의 초보적 조치인 종전선언 문제에서까지 후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 없이는 종전선언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자, 반대로 종전선언을 비핵화의 입구에 놓고 압박수를 둔 셈이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 오후(현지시간)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이용호는 그러면서 미국에 대한 불만을 본격적으로 쏟아냈다. “우리가 핵시험과로케트 발사 시험 중지, 핵시험장 폐기 등 주동적으로 먼저 취한 선의의 조치들에 대한 화답은 커녕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ARF 등에서 각국에 제재의 확실한 이행을 촉구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미 재무부는 전날인 3일 추가적인 독자 대북 제재도 발표했다.

이어 그는 “미국 내에서 수뇌부의 의도와 달리 낡은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들이 짓궂게 계속 표출되고 있다”며 “공동성명이 미국의 국내정치의 희생물이 돼 수뇌(정상) 분들의 의도와 다른 역풍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올해 9월에 맞이하게 되는 공화국 창건 70돌 경축행사에 다른 나라들이 고위급 대표단을 보내지 말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과 같은 극히 온당치 못한 움직임들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용호는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장구한 노정이며, 이제 역사적인 첫걸음을 뗀 데 불과하다”고 말했다. 표현은 한반도의 평화 구축이라고 했지만, 이는 비핵화의 노정 역시 길어질 것이라는 소리나 다름 없다.

이날 연설은 지난해 ARF 때처럼 미국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대북 적대시 정책을 꺼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연계시키고, 장기간의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며 ‘살라미 전술’을 쓰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은 향후 북핵 비핵화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예고나 마찬가지다.

ARF에서는 기대를 모았던 북·미 외교장관회담도 성사되지 않았다. 폼페이오 장관은 다음 행선지인 인도네시아로 이동하기 위해 오후 3시 10분쯤 먼저 행사장을 떠났다. 다만 폼페이오 장관과 이용호는 ARF 시작 전 악수를 나눴으며, 북핵 실무 협상을 맡고 있는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이용호에게 회색 서류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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