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서소문 포럼] 투자 요청을 구걸로 인식해선 미래가 없다

이상렬 2018. 8. 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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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고용 주체인 기업 참여 끌어내야 혁신 성장 가능
중소·벤처는 물론 대기업까지 경제 동반자로 삼아야
이상렬 경제 에디터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6일 삼성전자 평택 공장 방문을 두고 지난 3일 한편의 소동이 벌어졌다. 한국 경제를 우려하는 이들에겐 가슴 답답한 사건이었다.

청와대가 김 부총리 측에 ‘정부가 재벌에 투자·고용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를 전달했다는 한 언론 보도가 발단이었다. 그간 경제계에선 김 부총리의 방문에 맞춰 삼성이 100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해왔다.

김 부총리는 기재부 간부들을 불러모아 긴급회의를 열었고, 이날 저녁 해당 보도와 관련해 유감 표명을 담은 개인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 사이 삼성이 6일로 예정된 투자 발표를 미룬다는 소식이 삼성과 기재부 양쪽에서 확인됐다. 삼성은 추후 적절한 시기에 투자 계획을 밝히고 진행할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을 바라보는 현 정부의 시각이다. 경제정책 컨트롤타워인 부총리의 투자 요청을 ‘구걸’로 표현할 만큼 반(反) 대기업 정서가 팽배해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 부총리가 개인 명의의 입장문을 낸 것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입장문 발표는 100% 김 부총리의 뜻”이라고 했다. 해당 보도엔 청와대 관계자가 익명으로 인용돼있다. 보기에 따라선 청와대 참모들과 부총리 간 갈등으로 비칠 소지가 다분했다.

이례적인 걸로 따지자면 기업에 대한 투자 요청을 ‘구걸’로 여기는 인식이 더 이례적이다.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어떤 정부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선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안다.

청와대의 누가 그런 인식을 가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일 청와대는 그것이 사실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명확히 해명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오히려 그 뉴스에 힘이 실렸다. 그래서 시중에선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 그 같은 인식이 넓게 퍼져있는 것 아니냐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 삼성에 대한 투자 요청은 얼마 전 문 대통령이 직접 했다. 지난 9일 삼성전자 인도 노이다 공장 준공식 자리에서였다. 문 대통령은 “한국에서도 더 많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주기 바란다”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당부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에 투자와 고용 확대를 당부한 문 대통령의 결정은 옳다. 투자를 늘리고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기 때문이다. 삼성에 대한 투자 요청을 구걸로 여기는 청와대 참모라면 대통령의 인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고, 그런 참모들이 정책을 주도한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경제의 부진은 예사롭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최저’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라는 경제 지표들이 늘어나고 있다. 앞선 금융위기 때는 세계 경제가 위기였다지만 지금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 경기가 순항하고 있는데 한국 경제만 유독 내려앉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분기 성장률은 0.7%. 정부가 낮춰잡은 성장률 목표치인 연 2.9% 달성도 회의적이다. 2분기 설비투자는 10.8% 줄어 금융위기 이후 최대 감소를 기록했다. 세계 각국이 호황인데 한국 경제가 유독 죽을 쑤는 것은 투자 부진을 빼놓고선 설명하기 힘들다. 투자를 독려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부총리의 투자 요청까지 문제시하는 분위기에서 활발한 투자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간 김 부총리는 중소·벤처기업뿐 아니라 대기업도 혁신 성장의 파트너라고 강조해왔다. 그의 인식은 보편타당하다. 대기업을 빼놓고 한국 경제 생태계를 얘기할 수는 없다. 대기업을 배제한 혁신 성장은 구호로 끝나기 십상이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든 기업의 투자 의지가 이번 소동으로 꺾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문 대통령이 직접 이 혼선을 정리해주길 기대한다. 대기업 투자를 독려하는 것이 구걸인지 아닌지 말이다.

이상렬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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