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말한 개를 먹지 말아야 할 철학적 이유

2018. 8. 1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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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기고-김영환 동물법비교연구회 연구원
개식용을 대하는 두 가지 도덕관
관계 윤리와 정의 윤리
어느 쪽으로든 개식용은 부당하다

[한겨레]

충남 예산에 위치한 한 개농장에 식용으로 쓰이는 개들이 갇혀있다. 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관계에 따라 어떤 행위의 도덕성 여부를 판단하는 도덕관이 있다. 반면 어떤 행위의 도덕성 여부는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관계와 무관하게 판단되어야 한다고 보는 도덕관도 있다. 앞의 도덕관을 관계 윤리라 부르자.

맹자는 관계 윤리를 옹호한 사람 중 하나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신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호흘에게 들었습니다. ‘왕께서 당상에 앉아 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하로 지나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보시고 “소가 어디로 가는가?”하고 물으시자, 대답하기를 “장차 종의 틈을 바르는 데 쓰려고 해서입니다” 하였습니다. 왕께서 “놓아주어라. 내가 그 두려워 벌벌 떨며 죄없이 사지로 나아감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시니,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흔종(釁鍾)을 폐지하오리까?”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양으로써 바꾸어 쓰라.”하셨다.’ 합니다. … 이것이 바로 인(仁)을 하는 방법이니, 소는 보았고 양은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흔종(새로 종을 만들 때 희생을 잡아 그 피를 종에 바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위해 끌려가며 벌벌 떪’과 ‘그것을 봄’이라는 사실을 통해 형성된 피행위자와 행위자 간의 관계가 도덕의 기초라고 본다. 그래서 못 본 양은 죽여도 되지만 본 소를 죽이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판단을 한다. 맹자는 나아가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서 우는 소리를 들으면 고기를 못 먹는 것이 도덕 성품이니 도덕 성품이 발달한 사람은 고기를 먹기 위해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본다.

우리 아이 더 예뻐하는 게 비도덕적?

맹자의 주장은 ‘불편 부당성’을 대놓고 무시하여 도덕으로서는 언뜻 터무니없이 느껴지지만, 우리의 실제 행동은 바로 이렇게 관계에 따라 도덕 행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처럼 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특별히 강력한 부조 책임을 함의한다. 우리는 부모는 자녀를 돌볼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직장 동료는 업무상 조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약속을 한 사람은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한다.”(로널드 드워킨)

자신의 자녀를 낯선 이들에게 한 것보다 더 많이 돌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할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10년을 같은 방에서 지낸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10일을 슬퍼하면서, 아파트 같은 라인, 같은 층의 사람 죽음에 대해 10초만을 슬퍼하는 것은 도덕적이다.

관계에 따라 도덕 행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설명은 인지 능력상의 한계로 인해 모든 대상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학자들은 불편 부당성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식별해 내는 데에만도 감당하기 힘든 지식이나 인지능력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만약 인간이 관계에 무관한 도덕을 형성하였다면 인간은 인지적 과부하로 오래전에 멸종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불편 부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대상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일 뿐이다. “왜 개만? 닭은? 식물은?” 같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다수는 생명체를 공평하게 사랑하는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순전히 무심한 존재가 도덕체계를 유지할 수나 있을까?”(리차드 브랜트)

개농장의 개들이 도축장으로 운송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행위자와 대상의 관계에 따라 특정 행위의 윤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관계 윤리에서는 개식용의 문제를 인간과 개의 관계에 기초해서 판단한다. 개나 고양이는 ‘반려’동물이라는, ‘가족’이라는 기호를 획득한 동물군이다. 이는 제한된 집단 내의 현상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다. ‘KB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반려동물은 가족의 일원이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68.3%에 이르고, 양육경험이 없는 가구의 경우도 46.8%가 이에 동의한다. 미국에서는 작년에 사람이 소비할 목적으로, 개 또는 고양이를 도살하는 것과, 개 또는 고양이를 도살하기 위해 거래하는 것과, 개고기 또는 고양이고기를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자는 1년 이하의 금고 또는 2500달러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연방 동물복지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미국은 이 법안 발의 당시 44개 주에서 사람이 소비할 목적으로 개와 고양이를 먹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전통적으로 개와 고양이 식용을 허용하는 법문화를 가지고 있던 미국에서 이를 바꾸겠다고 연방수준에서 나선 것이다. 플로리다주 의원인 앨시 헤이스팅즈가 대표 발의하였고 2018년 8월3일 현재 245명의 의원이 공동제안자로 이름을 올렸다. 공동발의자 중 한 사람인 공화당의 트로트 의원은 “나는 네 다리를 가진 우리의 친구가 우리 가족의 얼마나 중요한 일부인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최고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하였다. 개나 고양이를 먹는 것은 가족 능력이 있는 자를 먹는 것이다. 관계 윤리의 관점에서 개의 식용은 부당하다.

인간을 죽여서 안 된다면 동물도 죽여선 안 된다

같은 속성에 대응해서는 같은 대우를 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보는 도덕관을 정의 윤리라고 하자. 정의 윤리에 따르면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어떤 행위의 도덕성 여부가 판단되어서는 안 되고 피행위자의 속성만을 고려하여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의 어떤 속성 때문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비윤리적인 이유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직관적인 설명이지만 아마 다른 설명을 찾기 힘들 것이다. 도덕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의하면 타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 외에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은 없다. 여기서 해라는 것은 죽음이나 고통처럼 사람이 동물로서 피하고자 하는 것 외에는 아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것은 많은 비인간동물에게서도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면 ‘같은 속성에 대응해서는 같은 대우’라는 원칙에 의해 이 비인간동물들도 죽여서는 안 된다.

존엄한 인간이 어느 면에서는 비인간동물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다른 동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러한 윤리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위해 인간존엄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헌법학 교과서에서는 “인간존엄성 조항이 일부 국가의 헌법에 수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독일 나치 정권과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대량학살, 강제노동, 박해와 탄압, 인간의 노예화, 고문과 테러 등 인간존엄성의 침해에 의한 역사적 반성으로서 독일 기본법과 일본 헌법에서 인간존엄성의 보호를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한수웅)고 설명한다.

지난해 8월28일 서울 태평로 언론회관에서 동물자유연대와 건국대 수의대 3R동물복지연구소가 개고기 항생제 검출에 관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인간존엄성이란 이처럼 인간의 필요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용된 개념이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도 “모든 사람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자유와 정의, 세계평화의 기초”라고 시작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와 정의,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인정될 필요가 있는 관념이지, 선존재가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4세기에 이미 교회 안에 성모승천에 대한 믿음이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1950년에 가톨릭에서 성모승천대축일을 제정한 것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인간존엄을 말하기 위함이지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갔음을 믿으라는 것이 아님과 같다. 물론 옛날에 칸트 등이 인간존엄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고 그 후에도 그러한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인간존엄성은 사람을 국가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수용된 개념이지, 인간의 높음이 철학적(존재론적)으로 정당화된 개념은 아니며, 인간존엄성 개념에 근거하여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높은 곳에 있고 인간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관계 윤리와 정의 윤리: 실천적 지침에서 다르다

정의 윤리와 관계 윤리는 실천적 결론에서 차이가 있다. 관계 윤리가 인간이 특히 가깝다고 느끼는 반려동물을 보호하자는 결론에 이른다면, 정의 윤리는 죽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훨씬 더 넓은 범위의 동물들을 보호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정의 윤리에 따른다면 비거니즘(완전 채식주의)을 윤리 지침으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우유를 넣어 얼음을 얼린 빙수를 먹지 않고, 꿀을 넣은 주스를 먹지 않으며, 가죽 신발과 벨트를 착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 이야기를 듣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누가 고기로 태어났냐고. 물론 비거니즘은 비거니즘의 지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떤 문화 속에 살면서 그 문화를 반대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그 문화를 실천하고 한편으로는 그 문화를 벗어난다. 그 사람을 모순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말 대잔치일 뿐이다. 그 사람의 도덕성은 자신의 시간을 ‘하나의’ 삶으로 주조해 내는 의지의 일관성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비건은 개와 고양이의 식용에 반대한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포기하면서까지 개식용 반대 집회에 나서며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적극 연대한다. 다만 그들은 이에 더하여 닭볶음탕 프로그램과 치믈리에 자격시험을 반대하고, 대량의 닭 수요가 유발한 배터리케이지(밀집형 닭장)에 반대하며, 배터리케이지의 필연적 귀결인 닭 425만마리의 죽음(6일 현재)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덕 문제를 도덕관이라는 포괄적 사유체계에 비추어 판단하기보다는 직관적이고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개식용과 관련해서는 ‘왜 개만?’, ‘전통문화다’, ‘인간이 우선이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 판단일 뿐이다. 관계 윤리든 정의 윤리든, 체계적 사유가 주는 결론은 개식용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김영환 동물법비교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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