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보식이 만난 사람] "극우 파시스트로 찍혀 좌파의 표적이 되고, 우파에서도 날 기피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2018. 8. 13.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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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 양동안씨

야당 시절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발언했다. "1948년 건국(建國)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反)역사적, 반헌법적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맞지만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일절 없다. 북한에서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창건 기념일(9월 9일)'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양동안(73)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이라는 책을 썼다. 당대의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던 인물이라, 객관적 증거와 논리를 제시해도 편향된 주장으로 비칠지 모른다.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양동안 전 교수는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도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8월 15일 같은 날에 '광복절'과 겹쳐 '건국일'은 더 묻혀 왔던 셈인데.

"광복절을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걸로 모두 잘못 알고 있다.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에 의해 해방됐는데 국경일로 만들어 축하했겠나. 1949년 법으로 제정된 국경일은 해방된 날이 아니라 독립을 이룬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그게 '광복절'이었다."

―36년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光復)'이란 표현을 쓴 것이 아닌가?

"해방 공간에서 정치 지도자나 언론기관들은 '해방'과 '광복'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군중집회의 플래카드를 보면 거의 모두 '해방'으로 되어 있었다. 해방 뒤 3년간은 미·소(美蘇) 군정의 시기였다. 이승만은 1947년 연설에서 '광복 대업을 완성하기에 민족 통일이 가장 필요하니…' '광복 사업에 협력하고자…'라고 했다. 광복은 독립, 건국과 같은 뜻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확정했다. 몇 달 뒤 국회에서 '광복절'로 명칭을 고쳐 통과시켰다."

―광복절은 당초 1948년 8·15를 기념하는 것이었다는 건가?

"그렇다. 광복절 명칭으로의 첫 기념식은 1950년 대구에서 열렸다. 전란 통이어서 대구매일신문이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제6회 광복절 기념식'이라고 유일하게 보도했다. 1년 전에 통과된 국경일법을 몰랐고, 횟수 계산도 5회를 6회로 틀리게 했다. 당시 정부의 홍보가 부족했는지 '해방 5주년 광복절 2주년 기념'이라고 쓴 조병옥 내무부 장관을 빼고는 다른 참석자들도 '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이라고 했다."

―그런 '광복절'이 지금처럼 일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 까닭은?

"이승만이 독재자로서 물러나면서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의 의의를 언급하던 관행마저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학계조차 '대한민국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 자체를 기피했다.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제정됐던 광복절은 해방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굳어졌다."

―8·15 국경일 명칭이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이었다. 한 우파 성향의 학자가 '건국 60주년 기념' 행사를 제기하면서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는 해방 정국에서 반탁·반공 운동을 하고 남한 단독정부에 찬성한 세력에만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며 공격했는데.

"이들의 주류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입장을 취해 온 세력이다. 1948년 건국은 나라의 생일을 정상적으로 찾아주자는 것이다.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하는 것도 해방 공간에서 다른 정파를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했을 뿐이지, '건국'이라는 말은 없었다.

"당시 정부 수립이 너무 어렵게 이뤄졌다. 이 때문에 정부 수립을 기념·선포한 것이다. 영토와 국민은 이미 확보됐고 정부 수립에 맞춰 주권을 인수받기로 돼 있어서 그때 말만 안 했지 '건국'이었던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봤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계승했기에 안 썼던 것은 아닐까?

"이듬해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이라고 했다. 주요 정당과 단체들도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했다. 가령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趙素昻)의 사회당조차 '8·15 이날은 우리 민족 해방 4주년 기념이요 우리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는 성명을 냈다."

―1948년 제헌 헌법의 전문(前文)에는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되어 있다. '민주독립국가 재건(再建)' 구절을 보면 이승만도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님을 인정한 게 아닌가?

"이승만이 어떤 생각에서 이 구절을 넣었는지는 그해 5월 31일 국회의장 취임 연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민주국을 공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 정신을 계승해 민국(民國) 건립을 다시 실행하게 됐다'에서 알 수 있다. 1919년에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립 정신을 살려 재건했다는 뜻이다. 1948년 정부수립기념식에서 이승만은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 '새로 건설되는 대한민주국'이라고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이승만은 1948년에 '민국 30년'이라는 연호(年號)를 썼다. 이는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 기점으로 한 것이 아닌가?

"그 직후 국회에서 '단기(檀紀)' 연호를 쓰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왜 자신이 '민국' 연호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3·1운동의 위대한 민주주의 정신을 숭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국' 국체를 선언했으니, '건국'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선언만 했지, 실제 국가를 구성하지 않았다. 국가 조건을 규정한 '몬테비데오 협약'에 따르면 영토·국민·정부·외교 주권 4대 요소를 충족해야 한다. 임시정부는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지배하지도, 국민을 실효적으로 통치하지도 못했다. 주권(主權)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미 건국됐다면 항일독립운동은 무엇을 위해 있었느냐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건국 시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는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를 '복국기(復國期)'로, 조국에 들어가 활동할 시기를 '건국기(建國期)'로 규정했다. 건국은 미래의 사업 과제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는 성명서를 내고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다. 다시 말하면 복국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다'라고 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제는 정권이 나서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는 것 같다.

"과거 좌파 정권은 건국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에서 '건국 50년의 시점에 맞춰 제2 건국 운동을 펼쳐 나가자'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에서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내년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임시정부는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해야지, 건국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창당준비위원회를 그 정당의 창당으로, 건물건립추진위원회를 그 건물의 건립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개인적인 얘기를 할까 하는데, 선생은 1988년 발표한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극우 파시스트로 낙인찍혔다. 5공(共) 시대가 끝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화를 되찾게 된 시점에서 왜 그런 글을 썼나?

"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부터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관심 많았다. 나는 사회 현상의 표면이 아니라 저변(低邊)을 봤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위 민주화운동의 주도 세력은 민족해방전선과 민중민주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은 민주화를 앞세워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했다. 이들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동안의 무기력과 오류, 부패를 반성하고 정신 차리라는 취지였다."

―글의 목적이 이뤄졌나?

"나는 극우 지식인의 대표로 좌파 진영의 표적만 된 것이 아니었다. 우파 진영에서도 나를 기피했다. 공론(公論) 시장에서는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선생의 이념적 성향과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글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좌익 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엔 완전한 좌익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라는 대목은 상당히 들어맞는 것 같다.

"유치한 예견이었는데…, 나는 사실에 근거해 주장을 펴왔다. 나라는 인간을 '어용 교수' '반동 지식인'이라고 매도하지만 말고 나의 글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달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히 왕따가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런 글을 괜히 썼다는 생각은?

"내가 시원찮은 사람이라 그때 참아봐야 내 인생 크게 바뀌지도 않았겠지. 지식인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옳다고 해도 자기 판단에 옳지 않으면 질러야지, 수적 두려움으로 가만있으면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5년 전부터 파킨슨병(신경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손발을 심하게 떨었고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데는 불편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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