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태평로] 北의 善意에만 기대는 건 '희망 고문'일 뿐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2018. 8. 1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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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非核化는 멀기만 한데 北 위상만 올라가고 제재는 구멍
말장난·감성적 전략만 일삼으면 희망은 더 큰 실망으로 돌아올 뿐
신동욱 TV조선 뉴스9 앵커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3개월 반이 지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던 북한 비핵화의 매듭은 아직 견고하기만 하다. 북한은 핵실험장 폭파 쇼를 하고, 미군 유해 송환 약속도 일부 이행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재개하고 개성공단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하는 등 일부 진전이 있었다.

이것은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체면을 고려한 최소한의 성의였을 뿐 진정한 비핵화와는 거리가 먼 조치들이다. 북한은 여전히 미국이 제시한 핵 폐기 시간표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연일 미국을 향해 '종전(終戰)선언'을 외치지만 양측의 생각 차이는 태평양의 동·서 양끝만큼이나 커 보인다.

청와대가 당초 북한 비핵화와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에 희망을 가졌던 배경에는 대략 세 가지의 '낙관적 전제'가 있었다. 첫째는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이 정말로 변했다면'이었다. 김정은이 어릴 적 서구에서 유학을 한 자유분방한 젊은 지도자이므로 김일성·김정일과는 생각이 다를 것이다. 즉 핵 하나만을 끌어안고 폐쇄적 왕국을 이끌어 가야 하는 답답한 사정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둘째 전제는 '미·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된다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복잡한 국내 정치의 장애물을 넘기 위해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고, 경제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 쉽게 성사되는 걸 보면서 청와대는 이 낙관적 전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셋째는 '중국이 가만히 있어 준다면'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굴욕 외교' 논란을 무릅쓰고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냉랭해진 중국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인 것 역시 이를 위한 사전(事前) 정지 작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이 세 가지 낙관적 전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충족됐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북한은 미국과 세기의 핵 담판을 벌임으로써 사실상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은 셈이 됐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상이 달라졌다. 어렵게 짜인 대북 제재의 그물망은 곳곳에서 구멍이 났다. 북한산 석탄이 러시아산으로 둔갑해 한국의 발전회사에 공급된 게 알려지면서 우리 정부의 입지는 더 좁아지고 있다.

아직은 먼 길을 가는 과정의 처음 몇 걸음째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면 아무리 멀리 가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북한 비핵화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다차 방정식을 푸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김정은 위원장의 선의(善意)에 의존하는 감성적 전략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고백해야 한다.

청와대 참모들이 유려한 글과 현란한 말솜씨로 국민을 '희망 고문(希望 拷問)'했다면 그 역시 즉각 중단해야 한다. 큰 희망이 실망으로 되돌아올 경우 남북문제가 꼬여 더 큰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하지 않았나. 북한의 제안으로 가을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고위급 회담이 13일 판문점에서 열린다. 남북 정상이 만나 또다시 말장난만 한다면 국민의 반응은 싸늘할 것이다. "진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는 영화 속 명대사가 우리 현실의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려면 정부 당국이 북한에 대해선 더 냉정하고, 우리 국민에겐 정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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