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9절에 막혔나, 날짜 빠진 정상회담

정우상 기자 2018. 8.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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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9월 평양만 합의

13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 직후 남북 수석대표는 취재진을 불러들였다. 북한 수석대표인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기자들을 향해 "(남북 정상회담) 날짜는 다 돼 있다"고 했다. 다만 "기자 선생들 궁금하게 하느라 날짜를 말 안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공동 보도문에는 '정상회담은 9월 안에 평양에서 열린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공동 보도문에 없는 말을 한 것이다.

곧이어 회담 결과를 브리핑한 우리 측 수석대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말은 완전히 달랐다.

조 장관은 "구체적 날짜는 여러 상황을 조금 더 보면서 협의하기로 했다"고 했다. "왜 북측과 말이 다르냐"는 질문에는 "'9월 안에'가 합의된 표현"이라고 했다. 이후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9월 초는 어렵지 않겠느냐"며 남북 정상회담 시기를 '9월 10일' 이후로 전망했다. 김 대변인은 "북한이 사정을 감안해 날짜를 정할 것"이라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국가적 중대사를 놓고 남북 대표와 청와대 모두 다른 뉘앙스로 답하는 전례 없는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애초 청와대는 '8월 말 정상회담'을 추진했고, 북측과 어느 정도 의견 접근도 이룬 것으로 알려졌었다. 청와대는 고위급 회담 하루 전인 12일에도 '8월 말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근거 없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회담 시기를 놓고 남북 간에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남북이 구체적 시기를 확정하지 못한 것은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이른바 9·9절) 때문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북한은 이번 9·9절을 맞아 체제 선전을 위해 대규모 열병식과 카드섹션 등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과 방북단을 9·9절 경축 특사로 포장하려고 정상회담을 9월 9일 직전에 하자고 제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가 여기에 부담을 느껴 회담 날짜를 최종 확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우리 정부에 종전(終戰) 선언과 대북 제재 완화 등을 미국에 더 강력하게 요구하라고 압박하기 위해 회담 날짜 합의를 미뤘을 가능성도 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이 정상회담 시기를 확답하지 않은 것은 한국 정부가 미국에 종전 선언 등을 더 강하게 요구하라는 의미"라며 "9월 평양 정상회담은 우리 의도와 달리 북한 체제 홍보를 위한 모양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13일 남북 고위급 회담이 끝난 후 '9월 평양'으로 정상회담 일정이 정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의겸 대변인은 "대략적 날짜와 장소가 나왔으니, 이날 합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공적 남북 회담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초 가을 정상회담을 8월 말로 앞당겨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대표단이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 전에 평양에 와 달라고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체제 선전에 활용될 것을 알면서 우리 정부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 연구원은 "9·9절 이전에 하느냐, 이후에 하느냐를 놓고 우리 정부가 고민한 것 같다"고 했다.

정권 수립 70주년을 앞두고 별다른 성과를 내세울 것이 없는 북한에 남북 정상회담은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한국 정부는 "비핵화 성과는 없이 북한 체제 선전에 이용당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북한은 지난 10일에도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의 비핵화 요구를 비난하면서 "9월 9일 공화국 창건 70주년에 참석하려는 각국 고위 사절단의 참가를 좌절시키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청와대는 9·9절 이전인 9월 초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 대변인은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면 9월 초는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9월 초라 함은 9월 10일까지"라고 말했다. '현실적 여건'에 대해 김 대변인은 "여러분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라며 9·9절이 문제였음을 내비쳤다.

일각에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訪北)에 맞춰 북한이 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려 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을 제외한 남·북·중 '3자 회동'을 북한이 추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북·미 협상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북한이 이를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북 제재 해제 요구도 남북 정상회담에 변수가 됐을 수 있다. 리선권도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우리 정부가 미국에 대북 제재 완화를 위한 설득을 하지 않는다면 순조롭게 날짜를 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여전히 남북 정상회담을 미·북 협상을 위한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남북이 일정에 최종 합의를 못하면서 경호·의전 문제도 논의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 때 북한 영빈관인 백화원 초대소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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