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김대중 칼럼] 10년이면 강산도 亡할 수 있다

김대중 고문 2018. 8. 14. 03:1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중 권력 강화, 反대기업, 복지 정책 확대 등까지.. 文 정권 방향, 베네수엘라 빼닮아
10년 만에 베네수엘라는 100만 자국민 탈출하는 '지옥' 돼.. 우리의 10년 뒤가 두렵고 무섭다
김대중 고문

노무현 대통령 집권 말기인 2007년 3월 '한겨레21'에 '젊은 진보 논객' 3인의 좌담이 실렸다. 제목은 '베네수엘라 국민에 길을 묻다'였고 '노무현에 실망하고 차베스에 열광하다'는 소제목도 눈에 띄었다.

"베네수엘라는 신(新)자유주의 물결을 정면으로 거슬러서 기간산업과 광물 에너지산업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시장(市場) 중심이 아닌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는 경제 체제를 실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운동 때 내걸었던 것과 달리 취임 초 미국을 방문해 이른바 '수용소 발언'을 했다. 이라크 파병도 그렇고 한·미 FTA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지지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반면 차베스는 미국의 온갖 압력과 견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해나가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해마다 GDP 성장률이 늘고 있다. 살인적 수준이던 인플레이션도 잡아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좌담 내용은 '노무현 시즌 2'라는 문재인 정권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좌파 실험'이라던 베네수엘라는 지금 망해가고 있다. 차베스는 죽고 그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후임 마두로 대통령의 정부는 1만%가 넘는 물가 상승률, 100만명이 넘는 자국민의 엑소더스(해외 도피)에 직면하고 있다. "지상에 지옥이 있다면 단연 베네수엘라가 이에 속할 것이다. 인민들의 지옥 탈출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식량, 식수, 전기, 약품 등 모든 것이 없는 이 저주받은 땅을 떠나고 있다."(스위스 일간지 NZZ) 한국 좌파의 '열광'은 완전히 허공에 뜬 셈이다.

놀랍게도 지금 문 정권하에서 취해지고 있는 정책 방향은 과거 베네수엘라를 많이 닮았다.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국가주의로 나가고 있는 점, 자본 통제, 참여 민주주의, 민중 권력 강화, 반(反)대기업 정책, 복지 정책 확대 등이 그렇다. 지금 한국 경제는 심각한 난조에 부딪히고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자영업계, 소상공인 사회에 비명을 불러오고 급기야 파업을 유발하고 있다. 경제 전망에 대한 불안감, '적폐' 독주와 자만에 대한 사회적 반감, 건전한 비판과 견제가 사라진 좌파 독재가 횡행하면서 사회 전체가 활력을 잃고 불안과 비관에 빠져 있다.

우리는 '남미의 희망'이며 '좌파 정치의 롤모델'이라던 베네수엘라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우리 경제는 미국 자본의 '식민'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자생력을 갖춘 경제 구조를 갖고 있고 잠재적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미국 대자본의 놀이터였던 것과는 기본이 다르다. 둘째, 우리에게는 베네수엘라에 없는 '북한'이라는 변수가 있다. 북한의 존재는 우리가 안보를 지상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셋째, 우리에게는 석유가 없다. 베네수엘라는 정권이 망해도 석유라는 자원은 남는다. 우리는 망하면 그냥 망하는 것이다.

우리를 굳이 다 망해가는 나라와 비교하는 것은 어떤 사디즘(가학증)도 아니고 '좌파 정권 때리기' 차원도 아니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웃음거리가 되고 어제의 부국(富國)이 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차베스 노선을 경애했던 우리나라의 좌파·진보 진영이 여전히 그 노선을 추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문제다.

좌파 진영은 문 대통령이 최근 규제 개혁을 들고 나오자 일제히 친(親)대기업 노선으로의 전환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문 정부로서도 경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규제 혁신이 불가피한 상황인데도 그의 '개혁'은 출발선에서부터 벽에 부딪히고 있다. 이념의 색깔을 덧씌우고 권력의 자의를 얹을수록 경제는 언제나 빗나가곤 했지만 역사는 늘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문 대통령은 머지않아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종전 선언, 주한 미군 등의 문제로 또다시 진영 내 반미 노선과 충돌하게 될지 모른다. 북한 편에 설 것인지, 미국 편에 설 것인지를 놓고 문 대통령과 그의 지지층은 노선 투쟁을 겪게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무현 정치'를 논할 때 우파나 좌파 모두 일탈의 징표로 FTA를 들먹이고 이라크 파병을 거론하며 제주 군항을 문제로 삼았듯이 훗날 '문재인 정치'를 논할 때 아마도 은산(銀産) 분리 등 '규제 혁신'을 거론할지 모른다. 다만 노무현은 그것들을 해냈지만 문 대통령은 그마저도 이겨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