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中 오지마을에 "왜놈 상관 쏘시오" 한글 새겨진 까닭
중국 산시(山西)성 쭤취안(左權)현 원터우디(雲頭低)촌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초입의 누각 담장을 도배한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에 남아 있던 글 위에 페인트로 덧칠한 것이었다. 마을 주민 리빙전(李丙珍ㆍ56)은 “우리 마을에 조선의용대가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며 “마을에 한글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비바람에 글씨가 희미해지면 다시 칠을 입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터우디에서 북쪽으로 270㎞ 거리에 있는 허베이(河北)성 후자좡(胡家庄)촌의 초등학생들은 ‘조선의용대 추모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부른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이 마을까지 침입했을 때 맞서 싸운 대원들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됐던 의용대 분대장 출신의 소설가 김학철(1916∼2001)이 지은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중과부적의 이 전투에서 대원 4명을 잃었다. 주민들은 일본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너머 황베이핑(黃北坪) 마을까지 시신을 메고 가 안장했다. 희생자 4명 중 한 명인 손일봉의 비석에는 ‘상하이 윤봉길 투탄 의거(1937년)의 공모자’라고 적혀 있다.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10년 넘게 중국 대륙을 누비던 젊은 넋이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역땅에 묻힌 것이다.
이밖에도 남북으로 400㎞로 이어지는 타이항산맥 곳곳에는 조선의용군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스먼촌, 난좡촌 등 4곳의 본대 주둔지와 전투지, 2곳의 희생자 묘역과 간소하게 차려진 스먼촌 기념관 등 10곳을 둘러보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산시성 샹우촌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 대원의 묘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공산당과의 관계는 두고두고 남북에서 조선의용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해방과 함께 약산은 서울로 귀국했으나 그는 좌익으로 몰려 체포되는 등 탄압 끝에 48년 북으로 갔다. 한 때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무정 등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일부도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그들을 이끌었던 무정 역시 숙청당했다. 결국 북에서 조선의용군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됐다.
제 대접을 못받은 건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금기시되던 조선의용대 연구가 1990년대에 시작되고 윤세주 등 희생자들에게는 훈장도 수여됐지만 본격적인 재평가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8ㆍ15를 앞두고 베이징 교민들과 함께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답사한 정원순 베이징 한인회 부회장은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중국 오지에 조선의용대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며 “우리 국민 누구든 임시정부나 안중근ㆍ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치열한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조국 독립을 꿈꾸던 젊은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타이항산(산시ㆍ허베이성)=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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