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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여기에 살았다"..日 우토로마을 75년 이야기

윤다정 기자 입력 2018. 08. 15. 07:00 수정 2018. 08. 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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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 방치 속에 생존한 주민들이 부르는 희망가"
"한일 시민, 양국 정부 움직여 문제 해결..역사적 의의"
해방 후 우토로에 남겨진 동포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생계를 잇기 위해 고물을 주워 파는 일을 많이 했다. 일본정부의 '마을만들기사업'이 추진되기 전까지 폐품회수업을 하던 가옥이 남아 있다. (임재현 作,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제공) © News1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지난 4월22일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마을에 들어선 시영아파트에는 단순한 공영주택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중한 일상과 삶을 지키고 싶었던 우토로 마을 주민들과 선량한 양심을 가진 일본 시민사회, 그리고 타국의 토지를 구매한다는 전례 없는 모금운동을 이끌어낸 한국 시민사회와 재일교포들이 힘을 합쳐 이끌어낸 귀중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1943년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우토로마을에 터를 일군 지 올해로 75년. 1세대 주민은 단 1명으로 줄었고, 마을의 규모도 원래의 3분의 1로 줄었지만, 기나긴 거주권 투쟁 끝에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었다. 주민들은 여기서 우토로마을의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해방과 정착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제73주년 광복절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 7일 <뉴스1>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인근에서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의 배지원 사무국장을 만났다.

배 국장은 "우토로 주민들은 국가와 사회의 방치 속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생존했다"며 "아픔을 딛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징용·징병 피해 머나먼 타향살이…돌아올 수 없던 주민들

우토로마을의 역사는 해방 전인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의 강제징용과 징병 대신, 태평양전쟁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등 1300여명이 공사장의 집단합숙소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우토로마을의 전신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일해도,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일당이라고는 잡곡 세 홉이 전부였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일본인 관리자들은 공사장을 재빨리 빠져나갔지만, 조선인들 노동자들은 덩그러니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뱃삯조차 없었을뿐더러, 일본정부에서 귀국하는 조선인들이 지참할 수 있는 금전에 제한을 뒀기 때문이다.

상하수도조차 제대로 깔리지 않은 마을에서 우물물을 마시고, 마을 밖에서는 '조센징'이라며 손가락질당하는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1949년 일본정부의 민족학교 폐쇄령 이후 먼 길을 걸어야 갈 수 있는 일본학교에 다녀야 했다. 우토로마을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 차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배 국장은 그러나 "우토로 동포들이 불쌍하고 고통받은 존재만은 아니었다. 삶의 기쁨도 느꼈고 아이도 낳아 길렀고 야구팀을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재일조선인 차별에 시달리고 고국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 각지에서 풍물을 하며 우토로 문제 해결을 호소했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제공) © News1

◇"'자국민 보호' 의무 방치한 국가, 우토로 문제 해결 나서야"

우토로마을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은 1989년 닛산차체가 우토로 토지를 부동산회사에 매각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지를 매입한 부동산회사가 토지 명도소송을 제기하면서 주민들 모두가 하루아침에 길에 나앉을 처지가 됐다.

같은해 교토지법에서 첫 공판이 열린 직후 일본 시민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지역시민들이 결성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주민들의 재판 전 과정을 도왔지만, 일본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에서까지 주민들은 완전히 패소하고 말았다.

1997년 한국인권단체협의회가 우토로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주민들의 사연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시민들이 주민들과 함께 한국을 찾으면서부터다. 최고재판소 패소 뒤 일본 내에서 호소할 수 있는 길이 닫혀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거주권이라는 보편 인권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상당수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자국민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나섰다. 배 국장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국민들이 방치되어 왔다"며 "일본 정부가 나몰라라하고 있었던 만큼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 각지에서 풍물을 하며 우토로 문제 해결을 호소했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제공) © News1

◇한일 정부 움직인 9억원의 힘…재일 1세대 '통큰 기부'도

우토로마을 토지를 사들이기 위한 전례 없는 모금 운동 또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배 국장은 "한일 양국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주 무모한 결정을 했다"고 웃었다. 성공적인 모금운동이 양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였다.

민족대표 33인에서 따온 '우토로 희망모금 캠페인 33인 희망대표'가 발족한 뒤, 만 2년간 9억여원이 모였다. 한국의 시민들은 물론 총련과 일본의 NGO들도 힘을 보탰다. 익명의 재일동포 1세대들이 도쿄에서 우토로마을까지 신칸센을 타고 찾아와 약 4000만엔에 이르는 거액의 현찰을 흔쾌히 기부하기도 했다.

시민의 의지가 모이자 정부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하반기, 주민들이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면담한 뒤부터였다.

배 국장은 "당시 확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수석 비서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봤다"며 "얼마 뒤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에서 '(우토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 중'이라는 워딩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되겠다'는 확신을 얻은 주민들은 거침이 없었다. 우토로마을 토지를 소유한 부동산회사와 담판을 짓고 토지를 판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제18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30억원 일괄 지원을 가결하게 된 배경에는 의원회관 방문마다 장미꽃을 꽂은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우토로마을 주민들은 옛 가옥 철거 전 집 앞에서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남겼다. (임재현 作,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제공) © News1

◇"우리를 기억해요"…평화기념관 건립 과제 남아

이렇게 사들일 수 있었던 토지는 우토로마을 전체 부지의 3분의 1 가량인 약 6560㎡(약 1980평). 마을의 옛 흔적 위에 들어선 1기 시영주택에는 주민 39가구가 먼저 입주한 상태지만, 주민들의 역사를 후대까지 전하기 위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짓는다는 과제가 아직 남았다.

우토로마을 토지구매 모금운동의 큰 축을 담당한 아름다운재단이 이를 위해 지난달 30일부터 '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지난 13일에는 한일 시민사회와 우토로 주민으로 구성된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도 결성됐다.

배 국장은 "한일 시민들이 움직이고, 그 영향으로 한일정부가 움직여서 푼 문제이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며 "한일 간의 역사적 아픔, 일제강점 이후 재일조선인들이 겪은 고통, 양국의 방치 속에서도 스스로 생존해 온 그들의 강인한 정신까지 후대에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배 국장은 "우익들의 타겟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과제 중 하나"라며 "일본 사회에서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우익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건물이 되면 좋겠다"는 걱정도 살짝 내비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와 흑인 차별의 역사를 담은 '디스트릭트 6 박물관'은 좋은 모델이다. 배 국장은 "처음에는 커뮤니티센터로 출발해 흑인 주민들의 역사와 생활사까지 포함하는 모습으로 발전시켰다"며 "김치를 팔아 일본의 활동가들을 UN에 보내고, 마을회관에 모여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던 주민들의 모습도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1940년대 중반 우토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족학교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들은 대부분 2세로 성장해 우토로마을 강제철거를 막는데 앞장선 인물들로 현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 제공) © News1

mau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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