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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파트가 유독 시끄러운 이유 있었네

한상혁 기자 입력 2018. 08. 2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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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값싼 벽식 아파트 건축, 1980년대부터 보편화
기둥식 구조보다 층간소음 심하고 리모델링도 어려워
건설 관계자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바뀌기 힘들 것"

사무실이나 학교 건물 등에서 위층 발소리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아파트에만 들어가면 윗집 아이의 걸음 소리가 ‘쿵쿵’하고 울린다. 이렇게 보면 윗집의 배려심 부족을 탓할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소리가 크게 울릴 수밖에 없는 아파트 구조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벽식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 내부. 사진에 보이는 벽이 모두 위층 무게를 지탱하는 내력벽이어서 철거할 수 없다. /한상혁 기자


아파트 구조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층간 소음 말고도 또 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짓는 아파트는 이론적으로 100년 동안 살아도 안전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20년만 돼도 ‘낡은 집’이 된다. 배관을 교체하거나 구조를 바꾸는 리모델링을 하기가 매우 어렵고 처음 지어진 그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파트가 갖는 이런 문제들은 ‘벽식’이라고 불리는 한국 아파트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유영찬 박사는 “벽식 구조는 아파트를 빨리, 싸게 짓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보편화된 방식”이라며 “외국에도 서민 아파트나 기숙사 등에 사용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거의 모든 아파트를 벽식으로 짓는 것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기둥식 아파트, 층간소음 줄고 리모델링 가능

건물의 구조는 크게 기둥이 있느냐, 없느냐로 나뉜다. 기둥 없이 벽이 위층 수평구조(슬래브· slab)의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가 벽식 구조다.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이 있는 구조는 수평 기둥인 ‘보’가 있으면 ‘라멘(Rahmen)’ 구조, ‘보’가 없이 슬래브와 기둥으로 이뤄져 있으면 ‘무량판’ 구조라고 한다.

아파트 바닥 구조의 분류. /조선DB


층간 소음의 원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벽식구조가 층간소음에 더 취약하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양관섭 박사는 “벽식 구조는 슬래브(수평)와 벽(수직) 구조가 면대 면으로 만나 일체화돼 있는데 이렇게 되면 슬래브에서 울리는 진동이 큰 소리로 아래층에 전달된다”고 했다.

기둥이 슬래브를 받치는 구조로 지으면 소음은 줄어든다. 슬래브의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되는 라멘 구조의 소음이 가장 적고, 슬래브가 기둥으로 이어지는 무량판 구조가 그 다음이다.

벽식 구조는 리모델링도 어렵다. 벽식구조는 벽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어 철거할 수 없지만 기둥이 있으면 벽을 허물고 내부 구조를 바꿔도 된다. 노후한 배관 등 설비 교체 역시 벽식 구조보다 기둥식 건물이 쉽다.

기둥식 구조로 지어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고층 주상복합의 경우 기둥식이 더 유리하다. /조선DB


아파트 구조가 기둥식으로 바뀌면 분양 과정에서 소비자 선택권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 지금같은 벽식 아파트는 일부 서비스 공간을 제외하면 구조가 동일하다. 전체 구조를 떠받치는 내력벽 위치를 바꿀 수 없는 탓이다. 반면 기둥식 아파트는 가족 수에 따라 방 개수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

골조(骨組)만 지어서 소비자에게 소유권을 넘기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른바 ‘골조 분양’이다. 소비자가 가변형 벽체를 이용해 방 구조를 정하고 마감재와 인테리어까지 결정할 수 있고 부실 시공에 따른 하자 분쟁도 줄일 수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작년 6월 경기도 성남시 고등지구에서 골조 분양을 시범 도입한다고 발표했다가 “여러 여건상 시행이 어렵다”며 포기했다.

■한국 아파트 98.5%는 벽식…기둥식 ‘정말’ 못 짓나?

한국 아파트 시장에서 기둥식 구조는 극히 드물다. 1980년대 후반 아파트를 빨리, 많이 짓기 위해 벽식 구조를 도입하면서 시장의 표준이 됐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국에서 2007년부터 10년간 공급된 500가구 이상 공동주택 중 98.5%(194만 가구)는 벽식이었다. 기둥식 구조는 서울에서 1만9171가구, 경기도에서 3667가구 등 모두 2만9202가구에 불과했다.

한국 건설 업체가 벽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또 있다. 비용 때문이다. 국형걸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기둥식 구조가 벽식 구조에 비해 소음·진동·리모델링 가능성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지만, 고층 주상복합을 제외하고는 벽식보다 비효율성이 큰 구조”라며 “특히 채광 면적이 넓은 판상형 아파트를 선호하는 한국 아파트는 벽식 구조가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무량판 구조로 지은 서울의 한 아파트 평면. 빨간 네모 부분이 기둥이고, 이어진 벽은 철거가 가능한 비내력벽이다. /삼성물산 제공


기둥식으로 지으면 1개층 높이(층고)가 높아 아파트 전체 높이 제한이 있다면 가구 수가 줄어들기도 한다. 한국주택협회에 따르면 벽식 구조의 평균 층고는 2.9m, 라멘 구조의 평균 층고는 3.3m다. 라멘 구조로 20가구를 지을 높이라면 벽식으로 22가구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공사비와 층고가 전부는 아니다. 공사비의 경우 3.3㎡(1평)당 10만여원, 가구당 기껏해야 수백만원이 더 들 뿐이다. 층고 차이 역시 라멘구조 대신 보가 없는 무량판식으로 지으면 1개층당 10cm 정도 차이난다. 구조의 우수성을 감안하면 몇억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소비자가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액수로 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파트 연관 산업 자체가 벽식 기준으로 된 것이다. 아파트를 짓는 대형 건설사와 마감, 내장, 인테리어, 가구 등을 만드는 회사의 공급 구조가 벽식을 전제로 설정돼 구조를 바꾸려면 이런 시스템을 다 바꿔야 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나서 기둥식 구조 건축에 따른 용적률 추가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 해법이 될 수 있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소비자가 분양가 인상을 감수하고라도 기둥식을 원하는지, 층간소음 억제 효과가 확실한지 등의 근거가 더 필요하다”며 “정부가 강력한 유인을 주지 않는 이상 당장 아파트 구조를 바꾸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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