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제의 고구려 침공은 왜 실패했는가?

임기환 입력 2018. 8. 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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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52] 598년 영양왕의 요서 출격에 대한 수나라 조정의 반응은 고구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사실 동북 변경에서 일어난 작은 충돌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을 만큼 전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 문제(文帝)의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590년에 수 문제는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요수(遼水)가 장강(長江)보다 넓은지, 고구려 인구가 진(陳)나라보다 많은지 따져보라"며 큰 소리친 바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번신(蕃臣)의 예를 지키기는 커녕 아예 선제공격까지 나섰으니, 수 문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책에서는 수 문제를 단지 1차 고구려 침공군을 일으킨 인물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곤 한다. 그러다보니 수 문제를 중국 왕조의 숱한 황제 중 하나 정도로만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수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볼 인물이 결코 아니다. 북주의 유력한 권신이었던 양견(楊堅·문제)이 581년에 북주 정권을 뒤엎어 수를 건국하고 문제로 즉위한 것은 역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권력 탈취 사례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수 왕조 개창 이후 문제의 행보를 보면, 그가 단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만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수 문제는 즉위한 후 인심을 수습하고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여러 개혁 정책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589년에 진나라를 통합하여 오랜 남북조 분열 시대를 마감하고 중원을 통일한 업적은 동아시아 판세를 뒤바꾸는 역사적인 성과였다. 게다가 장강 이남의 지역은 남북조 시대에 중국 최대의 곡창 지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남을 차지한 후 수 문제는 세금을 낮추었는데도 국고가 넘쳐서 곡물 창고를 새로 지을 만큼 풍족한 재정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부역을 경감하고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문제가 중국을 통일할 당시 400만호에 불과했던 호구수가 문제 말년인 606년에는 800만호가 훌쩍 넘는 수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수 문제 당시 비축한 물자가 얼마나 풍부했던지 수가 멸망하고 당이 들어선 뒤에도 한동안 이때 쌓아 놓았던 재정을 계속 사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통치시기를 일컬어 "절약에 힘쓰고 부역을 균평하게 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법령이 잘 시행되어 군자는 모두 살아감을 즐거워했고, 백성은 각기 그 생업에 안정을 찾아 … 인물이 번성하고 조야(朝野)가 즐거워하여 20년간 천하가 무사하더라" 라고 평하였다. 이 기록이 지나친 미화일 수도 있겠으나, 수가 당시 상당한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문제 초상 : 수 문제의 치세를 '개황(開皇, 문제 때의 연호)의 치(治)'라 부를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진=바이두

이렇게 중원 통일과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체제 정비에 따라 수의 국력은 그 어느 나라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다. 그런 나라를 세우고 만들어간 수 문제와 그의 신료들 입장에서는 저 멀리 동방의 고구려쯤이야 한 줌 세력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고구려가 대들었으니 곧바로 응징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식은 죽 먹기라고 판단했으리라.

598년 1월 영양왕의 요서 출격 소식을 들은 수 문제는 곧바로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2월 4일에 수 문제는 다섯째 아들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행군원수로,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으로 삼고, 모두 30만 병력을 동원하였다. 그해 6월에 수나라 대군은 고구려 정벌의 길을 떠났으나 먼 요동까지의 행로부터 그리 쉽지 않았다.

'수서'등 중국 기록에 의하면 양량이 거느린 육군은 임유관(臨兪關)을 나와 요동으로 진격하다가 홍수를 만나 군량 보급이 끊기게 되어 군사들이 굶주리고 질병이 나돌아 많은 군사들이 죽어갔다. 또 주라후가 거느린 수군도 평양을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많은 병선이 침몰하여 군사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수군의 사상자는 열의 여덟, 아홉이었다고 한다. 결국 수의 1차 고구려 침공은 고구려 영내를 밟아 보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중국 사서 기록과 달리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군에 의해 참패를 당해 철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당시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라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水軍)이 고구려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격파되고, 이에 보급이 끊기게 되어 할 수 없이 퇴각하는 양량의 육군을 고구려군이 참패시켰다고 하면서, 중국 사서에서 수나라 대군이 스스로 철군한 것처럼 기록한 것은 치욕을 숨기고자 하였던 춘추필법(春秋筆法)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기록을 '서곽잡록(西郭雜錄)' 등을 참고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당시 전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적고 그나마 중국측 기록뿐이며, 신채호 주장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수서' 등에서 수 양제의 참패를 기록하면서 수 문제 때의 패전을 굳이 숨겼다는 점은 쉬이 납득되지 않기 때문에, 수나라의 1차 침공은 여러 이유로 제대로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한 최악의 실패작으로 보는 게 현재로서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수의 원정군은 왜 고구려 영내에 들어서기 전에 괴멸하고 말았을까? 일단 중국측 기록대로 홍수와 전염병, 풍랑 등이 주된 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기상 조건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갖고 대군이 움직이는 것은 군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수군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월에 원정군을 동원령을 내리고 6월에 원정길에 나섰으니, 3개월이란 기간은 30만 대군의 원정을 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로는 수 원정군 지도부의 분열을 들 수 있다. 당시 수군의 총사령관은 양량과 왕세적이고, 고경(高熲)이 원수장사(元帥長史)로 군 지휘부에 참여하였다. 고경은 수 문제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로, 589년에 강남 진을 정벌할 때에도 양광(楊廣)과 함께 참여하였다. 고구려 정벌군을 이끄는 문제의 다섯째 아들이 양량은 598년 당시 겨우 20세 전후의 나이로 추정된다. 아직 대군을 이끌기에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했기 때문에, 문제는 왕세적과 고경으로 양량을 보좌케 한 것이다.

처음 대군을 이끄는 왕량은 이번 고구려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워 아버지 문제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컸을 것이다. 이와 달리 고경은 처음부터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군 지도부의 입장 차이가 수나라 대군의 진군에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왕세적 등은 수의 영주총관이 있던 유성(柳城·현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회군하였다고 하고, 양량 등은 요하까지 진군했다가 회군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분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렇게 원정의 준비 부족 및 군 지도부의 내분에 기상 조건이 겹쳐 전투력을 상실한 수나라 대군은 고구려 영내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가 수에 사죄하는 사신을 보내자 곧바로 이를 명분으로 철군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와 수의 1차 대결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끝났다. 이는 고구려와 수, 두 나라 모두 상대방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결과였다. 고구려의 요서 출격도 수의 대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수 문제의 침공 역시 고구려 군사력이나 원정길에 대한 무지에서 성급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여기서 교훈을 얻었다. 다만 그 교훈은 전쟁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것인가였다. 이렇게 전무후무한 대전쟁이 예비되고 있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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