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어머니 만났다가 '간첩누명'..26년 만에 동생 재회

2018. 8. 2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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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정부 승인해 북 어머니 상봉
갑자기 체포 간첩죄 씌워 옥살이
북 동생 신청으로 재상봉 성사
"엄마 돌아가셔" 소식에 눈물바다

유복자, 68년 만에 아버지 만나
"맏아들이에요 맏아들" 복받쳐
기다리던 어머니는 두달 전 운명

100살 할머니, 북 여동생과 재회
수십년 세월에도 한눈에 알아봐

[한겨레]

전쟁고아가 된 사내에게는 소원이 있었다. 휴전선 너머에 있는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만나는 일이었다. 고학하며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했고, 마흔 넘어 타이(태국)에 어엿한 공장을 차렸다. 마침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내걸고 분단 이래 처음 공개적으로 남북관계 개선 정책을 폈다. 사내는 정부에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냈다. 1992년 9월 평양에 갔다.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 나이가 68살이었다.

4년10개월이 지난 어느날, 당국은 갑자기 사내를 체포했다. 잠입 탈출, 찬양 고무 등 ‘간첩 누명’을 씌웠다. 20일 동안 취조하고 때리고 고문했다. 2년6개월 형을 선고했다. 옥살이를 한 지 1년여가 지났을까,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8·15 특별사면을 받아 세상으로 나왔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만난 대가려니 했다.

“엄마 죽었잖아.” 어머니를 만난 죄로 간첩 누명까지 뒤집어쓴 송유진(75)씨는 24일 금강산에서 열린 21차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의 첫 단체상봉에서 북쪽 남동생 송유철(70)씨를 만났다. 동생은 형을 만나고 1년 뒤 엄마가 돌아가셨다며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형 유진씨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씨는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뒤 두어차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번엔 북녘 남동생 유철씨가 형을 찾았다.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남측 조정기(67·왼쪽)씨가 북측에서 온 아버지 조덕용(88) 할아버지를 얼싸안고 오열하고 있다.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유일한 ‘부자 상봉’…태어나서 처음 북녘 아버지 만나 “아버지, 그때 소고기 어디서 사셨어요?” 남쪽 아들 조정기(67)씨가 북쪽 아버지 조덕용(88)씨의 귀에 대고 외치듯 물었다. “….” “(아버지가 피난) 나가실 때 어머니가 그랬대요. 임신했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소고기 사서 이모 손에 들려보낸 거로 알아요.” 아들은 아버지 쪽으로 몸을 기울여 들은 말을 곁에 앉은 가족들에게 전했다. “홍천역에서 사셨대요. 홍천역.”

아버지는 뱃속에 아들이 들어선 지 100일이 됐을 무렵 북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과부로 68년을 살았다. 가닿을 방법도 없는데 평생 남편을 기다렸다. ‘유복자’로 살아온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다.” 아들은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들다, 홀몸으로 자식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를 떠올리니 속상함이 치밀어 올랐다. ‘왜 이제야….’

이날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첫 단체상봉에서 태어나 처음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서러움과 그리움에 복받쳐 눈물을 터뜨렸다. “맏아들이에요, 맏아들.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살아 계실 줄은…. 어머니 돌아가신 지 한달 20일 만에 연락받았잖아요. 조금만 미리 했으면….” 아버지는 미안함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건강하셔서 괜찮아요. 나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살아 계신 줄은.” 아버지와 아들은 이날 오후 7시부터 열린 환영만찬에서 술 대신 와인잔에 물을 따라 건배했다. 술을 못하는 건 조씨 집안 내력이다.

남북의 이산가족이 분단 후 65년 만에 다시 만나 진한 혈육의 정을 나눴다. 8.15 계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우리측 최고령 상봉 대상자 강정옥(100) 할머니와 북측의 동생 강정화(85) 할머니가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세 자매의 상봉…100살 큰언니가 들려준 엄마 이야기 “저기다! 저기!” 한복 차림을 한 북쪽 강정화(85)씨가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남쪽 가족들이 외쳤다. 수십년의 헤어짐 뒤에도 피붙이는 한눈에 알아봤다. 이번 상봉에서 북쪽 강정화씨는 남쪽의 큰언니 강정옥(100)씨, 동생 순여(82)씨를 찾았다. 큰언니 정옥씨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나이보다 16살을 더 먹었지만, 동생을 만나자 생전의 엄마 이야기를 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나가는 17살 처녀만 보면 ‘우리 딸도 열일곱인데’ 하셨어. 자매들이 귀가하면 ‘아이고, 정화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하셨어. 어머니 눈에 다 정화로 보인 거야.” 17살에 취직하러 서울에 갔다 북쪽으로 가게 된 뒤 영영 고향인 제주로 돌아오지 못한 정화씨는 열일곱 소녀처럼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금강산/공동취재단,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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