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할만한 전쟁포로였다" 베트남마저 매케인 애도

박형기 기자 2018. 8. 2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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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매케인은 솔직하고 열렬하며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전쟁포로였다고 베트남 포로수용소 관계자가 밝혔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7일 보도했다.

매케인이 베트남 전쟁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할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트랜 트롱 듀엣은 "매케인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여려 차례 했다"며 "그는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매케인의 아버지가 해군 제독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왕자'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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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옛 포로수용소 소장이 매케인 관련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SCMP 갈무리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존 매케인은 솔직하고 열렬하며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전쟁포로였다고 베트남 포로수용소 관계자가 밝혔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7일 보도했다.

매케인이 베트남 전쟁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할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트랜 트롱 듀엣은 “매케인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여려 차례 했다”며 “그는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케인은 신념으로 간수들의 존경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포로수용소장으로 퇴역 대령인 듀엣은 “그와 논쟁할 때 그의 강하고 고집스런 면이 좋았다”고 말했다.

매케인 상원의원은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1967년 10월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포로로 잡혀 당시 하노이 호아로 포로수용소에 5년 반가량 억류됐다.

그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될 당시 한 다리와 두 팔이 부러진 상태였다. 매케인의 아버지가 해군 제독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왕자’라고 불렸다.

그는 포로수용소 시절 초기에는 이질에 시달리며 하루에 2~3시간 동안 맞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러나 포로수용소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런 중에도 사내들 간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매케인과 당시 소장이었던 두옛은 가까워졌다.

두옛은 “노역 등 일과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고, 여자 이야기도 했다”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매케인 의원은 조기 석방 제의에 대해 “자신보다 먼저 포로가 된 미군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거부해 전쟁영웅이 됐다.

매케인이 진정 위대한 점은 베트남 전쟁포로였지만 미국과 베트남이 관계를 개선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의 국교 수교 이후 베트남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양국 관계개선에 앞장섰다. 특히 1995년에는 그가 갇혀 있었던 포로수용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두옛이 포로수용소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매케인의 사망소식을 전하자 두옛은 “너무 슬프다”며 “진심어린 애도를 가족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두옛은 "포로와 간수가 아니라 전쟁 베테랑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진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sino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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