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다시 걷는 '고종의 길'
한국 근대사박물관 정동 되새기는 계기 돼야
‘고종의 길’은 고작 길이 120m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막상 밟으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지난 3년간 새로 쌓은 석축(石築)과 돌담에서 시간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실체보다 의미에 더 무게를 싣는 건 아니지 스스로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약간의 떨림과 긴장은 어쩔 수 없었다. 122년 전 이 길을 지났던 고종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봤다. 행여 천리길보다 멀게만 보이지 않았을까.
‘고종의 길’은 미 대사관저 북쪽 방향에 있다. 현재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을 거쳐 구(舊) 러시아 공사관(사적 253호)에 이르는 길이다. 대한제국 시절 미 공사관이 만든 정동 지도에 ‘왕의 길’(King’s Road)로 표기돼 고종의 이름이 붙게 됐다.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떠난 고종은 이 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맡겼다. 그 유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기세등등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궁녀로 위장하기도 했다. 황제로선 치욕적인 행차였다.
새로 단장한 ‘고종의 길’ 곳곳에는 근대 한국의 아픔이 어려 있다. 길 초입 오른편의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일제의 한반도 수탈을 증언하는 2층 건물이다. 한때 미 대사관 숙소로 사용했다. 인적 끊긴 건물 앞마당과 1층 기와 사이에 강아지풀이 무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문화재청은 다음 달 이 건물을 철거할 예정이다. 그런데 굳이 없애는 게 능사일까. 다른 곳에 옮겨 교육자료로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즉 비극의 장소도 관광유산으로 떠오른 시대인데 말이다.
길 끝자락 솟을대문을 지나 정동공원으로 나왔다. 사방이 온통 한국 근대사 현장이다. 공원 언덕 위에 고종이 1년간 머문 러시아 공사관이 보인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은 3층 전망탑만 남은 상태다. 공원 입구에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수도원 정동수녀원이 있었다는 안내판도 있다. 정동제일교회(한국 첫 개신교 교회)·배재학당(첫 근대식 사립학교)·이화학당(첫 여성학교) 등 ‘최초’가 수두룩하다.
아관파천의 굴욕은 대한제국 성립으로 이어졌다. 1897년 다시 ‘왕의 길’을 따라 덕수궁에 돌아간 고종은 ’황제의 나라‘를 선포했다. 정동공원에선 미니 사진전 ‘오얏꽃 핀 날들을 아시나요’가 열리고 있다. 1910년 한일병탄까지 대한제국 영욕의 13년 훑고 있다. 자주독립국에 대한 염원은 물거품으로 끝났지만 험악한 정세에도 갖은 외교 노력을 다한 고종의 몸부림을 깎아내릴 순 없을 것 같다.
고종 시대는 최근 사극 ‘미스터 션샤인’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희구한 반면 손쓸 방편이 적었던 고종의 무력감이 중간중간 노출된다. 구한말의 사랑과 야망, 신문물의 유입, 열강의 각축, 의병 활동도 충실하게 재연됐다. 한국 드라마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예컨대 극중 미 해병대 장교 유진 초이(이병헌)가 근무한 미 공사관 한옥은 지금 미 대사관저에 남아 있다.
요즘 정동 일대가 뜨고 있다. 영국대사관 정문에서 끊긴 덕수궁 돌담길 70m가 은행잎 물드는 10월에 뚫린다. 덕수궁 돌담길 1100m 전 구간을 돌 수 있게 됐다. 같은 시기 정식 개방하는 ‘고종의 길’과도 연결된다. 반쪽으로 갈라진 덕수궁 제모습 찾기 공사도 두 달 전 시작됐다.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한국 근대사의 복권이다.
현재 정동길 입구에는 작곡가 이영훈 10주기 추모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광화문 연가’) 가사가 적혀 있다. 이제 근대사 박물관 정동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건 연인만이 아닐 것이다. 마침 내일은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완전히 앗긴 국치일(國恥日). 과거의 생채기도 당당히 껴안는 자신감이 절실하다. 한 세기 전보다 더 어지럽게 돌아가는 동북아 정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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