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과한 정보

서울문화사 2018. 8. 28. 10:00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친구나 직장 동료의 쓸데없는 긴 이야기에 피로를 느끼지는 않는지? 멈출 수 없는 'TMI'에 대하여.

“어제 우리 강아지 생일이었어. 케이크 정도는 직접 만들어주고 싶어서 퇴근하자마자 다진 한우랑 단호박, 당근, 닭가슴살을 사서 만들어줬잖아. 얼마가 들었는지 알아? 거기다 2시간 동안이나 만들었다고. 우리 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깔모자 씌워주고 사진 찍으니까 그림은 되더라. SNS에 올렸더니 ‘좋아요’ 폭발했잖아. 근데 내년엔 못 해주겠더라. 너무 힘들었어.” 무슨 이야기냐고? 이것이 바로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 TMI)’이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이야기, 혹은 타인에 대한 과한 정보.



이것까지 알아야 하나?

요즘 ‘TMI’라는 신조어가 유난히 눈에 띈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은 말 그대로 너무 많은 정보, 즉 과잉 정보를 뜻하는 말로 2000년대부터 영어권에서 사용된 인터넷 용어다. 국내에서는 지난해부터 SNS를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한 누리꾼이 정치인 등 유명인들에 대한 과도하게 사소하거나 사적인 정보를 수집해 ‘TMI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공유했던 것. 해당 게시물의 내용을 살펴보면, 12월 19일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이라는 것, 박근혜의 주량은 소주 2잔에 허리는 26인치 그리고 4만 9,000원짜리 화보집을 냈었다는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은 키스 데이인 6월 14일이고, 유승민 의원은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것 등이다. 온라인상에서는 ‘이걸 꼭 알아야 하나?’ ‘원하지 않는 정보를 알아버렸는데 잊히지도 않는다’는 의견이 퍼지며 TMI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TMI 이전에 ‘TMT’가 있었다.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의 약자인 TMT는 과도하게 필요 이상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포털 사이트에 ‘투 머치 토커’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박찬호가 나온다. 누군가에게 쉴새없이 말하는 그와 지친 듯한 대화 상대의 사진이 연속으로 발견되며 팬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으로 사용됐다. TMI와 TMT 모두 원하지 않는 과한 정보에 노출될 때 그것을 지적하는 용어인 것이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TMI란 말이 유행하는 원인으로 “정보 과부하”를 꼽으며 “개인들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쓸데없는 정보 때문에 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생긴 말”이라고 설명했다.

마치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조직에서든 이상한 사람이 한 명은 꼭 있기 마련이다. 만약 자신의 조직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한 사람이 바로 본인인 것)’처럼 어떤 조직이나 상황에서든 한 사람쯤은 TMI를 남발하는 존재를 접하게 된다. 가령 출근해서부터 어제 자신이 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직장 동료나 자신의 셀카를 계속 메신저로 보내며 리액션을 요구하는 대학 동기, 혼자 쇼핑하는 것을 즐긴다면서 사고 싶은 옷이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보내며 의견을 요구하는 사촌 동생까지, 모두 TMI를 외치고 싶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왜 이렇게 과한 정보까지 타인에게 말하는 것일까?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시대,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도 길다.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일이 생겨도 대화를 할 상대가 없으니, 누군가 말할 상대가 눈앞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사소한 것까지 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TMI를 남발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놀이가 된 TMI

‘안물안궁’ ‘설명충’ ‘알빠야 쓰레빠야’ 등 과한 정보를 비꼬는 신조어는 지금껏 있어왔다. 그러나 TMI의 경우 단순히 현상을 지적하는 부정적 단어로만 쓰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놀이 문화 혹은 쓸데는 없지만 재미있거나 상황에 따라 유용할지도 모를 정보를 뜻하는 개념으로 변화하는 모양새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TMI를 말해보자’라는 식의 게시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정말 사소해 누구에게 딱히 말할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며 소통하는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다이어리를 교환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생활 정보가 범람하는 과잉 연결 시대에 어떤 정보를 선별해야 하는지 가리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껴 TMI를 외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처럼 과잉 연결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TMI를 공유하는 놀이가 유행하는 이유는 시공간의 제약을 떠나 자신과 잘 통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SNS의 특성 때문이다. 이상적인 관계를 형성한 타인의 사생활이 이야기 형태로 꾸며져 게시되니 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TV 프로그램과 매체들도 ‘TMI 연구소’ ‘오늘의 TMI’ ‘TMI 토크’ 등의 코너를 만들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중이다. 또한 특정 아이돌의 팬이 되기 위해서는 TMI가 필수라며, 단순히 아이돌의 노래나 춤을 좋아하는 것보다 팬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소한 정보들이 아이돌 ‘덕질’의 핵심이라는 의견도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시험에 나오는 내용만을 지식인 듯 습득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에 필요한 정보만 유용한 것으로 여기며 지내온 젊은 세대. 정보의 과잉 속에 사는 요즘은 특히 정보의 ‘큐레이팅’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군가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정리해주는 것. 인터넷상에서 짧게 축약된 뉴스조차 읽지 않아 ‘베댓’으로 뉴스를 읽는 시대다.

자연스럽게 사회가 요구하는 틀 밖의 지식은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용하게 느껴지는 특정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이 TMI인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속에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닌 정보일 경우가 많고 지금껏 학교에서는 지식을 외우게 했을 뿐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적 유희’에 대한 욕구도 인간이 지닌 자연스러운 욕구이기에 시험 문제에도 나오지 않고, 회사 생활에 필요하지도 않은 이러한 TMI 지식들에 대한 니즈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대넓얕>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주제들을 선정해 얕게 한번 파보겠습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슬로건의 팟캐스트 방송이다. 매회 ‘사후 세계’ ‘칸트’ ‘실존주의’ ‘독재와 민주주의’ 등 철학과 정치는 물론, 오컬트까지 다룬다. 방송 내용을 엮은 단행본도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들이 다루는 내용을 큰 카테고리로 나누면 ‘인문학’이다. 높은 취업률이 좋은 대학의 척도가 되면서 실용 학문에 자리를 내어준 인문학이 TMI가 된 시대다. 이제는 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는 TMI인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사람들은 팟캐스트와 서점가로 몰려들었다.

<지대넓얕>을 모티브로 tvN 예능 <알쓸신잡>이 제작됐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란 부제를 내건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자인 유시민 작가, 정재승 박사, 유현준 건축가 등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의미 있는 사실들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인간과 인간 사회, 문화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지만 시험 문제에 나오지 않고 돈을 버는 데도 도움이 안 되니 ‘알아두면 쓸데없는’이라는 제목은 정보과잉 시대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에디터 : 김안젤라 |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Copyright © 우먼센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