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주먹' 팔순잔치에 조폭 천명 모였다

최재훈 기자 2018. 8. 3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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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주먹’ 조창조, 자전적 소설 ‘전설’ 출판기념회
전국 조폭 1000여 명, 전직 총리 장관도 참석
경찰 "오버 말라" 경고에 "아우들 빠져라" 몸 사렸지만...

30일 오후 서울 중구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열린 조창조씨의 출판기념회에 전국의 조폭 등 1000여 명이 몰렸다./김명진 기자

"자~ 오늘은 온화하고 고급스럽게 합시다. 의전 중인 아우들은 전부 밖으로 빠져주세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로 짧은 머리에 검은색 양복,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20~30대 젊은이들은 가슴에 ‘STAFF’(스태프)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달았다. 벤츠·BMW 등 고급 외제승용차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한쪽에선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줄을 맞춰 들어갔다.

2층 그랜드볼룸에 올라서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들이 가득했다. 500여 석 원탁 테이블은 빈자리 없이 빼곡했다. 백발의 곱슬머리 사내가 들어서자 모두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다. "형님 건강하십시오", "형님. 오래오래 사십시오" 소리가 이어졌다. 주먹계 ‘큰형님’으로 불리는 조창조(80)씨였다. 이날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전설’ 출판기념회 겸 팔순 잔치. 하객은 1000명도 훨씬 넘어 보였다. 가족과 고교동문,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가 여럿 참석했지만 대부분은 ‘주먹들’이었다.

◇전·현직 두목급 주먹들 한자리에
오후 2시쯤 사회자가 행사 시작을 알리며 "아우들은 빠져달라"고 하자, 테이블마다 2~3명씩 서 있던 젊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행사는 시작됐다. 축가로 드라마 ‘야인시대’ 주제곡이 연주됐다. 이어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는 축사에서 "조창조는 이 시대를 사는 가장 사나이다운 사나이"라고 했다.

30일 오후 서울 중구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열린 조창조씨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전설’ 출판기념회에서 조씨가 하객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김명진 기자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두목급들이 대거 참석했다. 70년대 서울 명동을 장악했던 신상사파 신상현(84)씨와 부산 칠성파 이강환(74)씨는 축전을 보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출연했던 배우 정일모씨는 ‘연예계의 협객’이라고 소개됐다. 1987년 이른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인 이른바 ‘용팔이 사건’ 주범이었던 김용남(68·목사)씨도 VIP석에 앉아 있었다. 행사 진행 관계자는 "경찰이 조폭들 모임처럼 보이지 않게 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해서 현역(조폭)들은 상당수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경찰도 긴장감 속에 행사를 지켜봤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형사 30여 명이 투입돼 행사장과 호텔 주변을 살폈다. 경찰 관계자는 "명목상 출판기념회라 제재할 수는 없지만, 조폭들이 90도 인사를 하는 등 다른 호텔 이용객들에게 위협감을 주는 행동들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다"고 했다.

◇이수성·최시중 등 정·관계 인맥도 과시
조창조씨는 시라소니(이성순) 이후 맨손 싸움의 1인자로 불린 원로 주먹이다. 김두한을 ‘곰보형’, 이성순을 ‘시라소니형’이라고 부르니 우리나라 주먹계 2세대쯤 된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8살 때 월남했다.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사업하는 외삼촌이 있던 대구로 갔다.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가 사실상 고향이 됐다. 마침 6·25전쟁을 맞아 또래들보다 2년 늦게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복싱과 유도, 씨름을 즐겨했고, 그때부터 싸움판에서 진 적이 없었다. 고교 시절엔 이미 ‘대구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졌다.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라고 불렸다.

조창조씨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애 실망 끼치지 않고 살겠다”고 말했다./김명진 기자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서울 염천시장에 터를 잡았다. 시장 내 소매치기와 거지들을 내쫓으며 상인회 경비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무교동 일대 호남 출신 폭력배들의 ‘큰 형님’으로 불리며 명동 신상사와 함께 서울 양대 주먹으로 불렸다. 1975년 1월 2일 한참 후배였던 조양은(68)씨가 호남 출신들을 이끌고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공격한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조씨는 당시 조양은씨의 뒤를 봐주면서 결국 조씨를 검찰에 자수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영화에 나오듯 회칼과 각목이 등장하고, 폭력배들의 죽고 죽이는 이른바 ‘전쟁’이 시작된 계기가 됐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서 활동했고, 1991년에는 경북 김천관광호텔 살인 사건 배후로 지목돼 안동교도소에서 8년간 복역했다. 당시 주임검사가 박근혜 정부 시절 민정수석을 지낸 고(故) 김영한 수석이었다. 2015년에는 ‘조희팔 다단계 사기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조씨와 의형제를 맺고 지낸다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조씨의 대륜고 3년 선배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의익 전 대구시장 등이 참석했다. 주호영 자유한국당 의원과 조재구 대구 남구청장, 박팔용 전 김천시장, 배우 김용건씨 등은 축하 화환이나 축전으로 대신했다. 이 전 총리는 "과거 일본 야쿠자로부터 테러 위험이 있었는데, 조창조 회장이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해줬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들었다"며 "그만큼 조 회장은 자기가 한 일도 감추며 알아서 도와주는 의리 있는 사나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경비용역업 등에 관여하던 조씨는 그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를 끝으로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했다.

30일 오후 서울 중구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조창조씨의 고교 선배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건배사를 하고 있다./김명진 기자

◇일대기 그린 영화제작도 준비 중
이날 소개된 소설 ‘전설 – 최고의 사나이 조창조 1부(3권)’는 웹툰 강남화타, 소설 고고학자 등을 쓴 작가 묘재(妙才·필명)가 썼고, 형제기획(대표 이명재)이 펴냈다.

어린 시절을 주로 다룬 1부에서는 1960~1970년대 시대상을 비롯해 거지왕 김춘삼, 명동칼국수 창업자 등 실존 인물과의 숨겨진 인연을 소개했다. 또 곳곳에 격투장면이 묘사된다. 1975년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이야기만 담았다. 주먹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회자되는 이 사건의 전말은 2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조씨는 당시 무교동 호남파와 명동 신상사파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 배경, 그 과정에서 왜곡된 진실,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등을 낱낱이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조창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제작도 준비 중이다. 기획사 관계자는 "현재 1차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상태로, 시나리오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창조씨는"먹고 살기 어려웠지만, 우리 때는 사내들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낭만이 있는 시대였다. 건달들도 힘없는 사람들 괴롭히지 않았고, 싸우고 나면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멋이 있었다"며 "지난 시절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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