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불모지'서 '붉은 물결' 꿈꾸는 미국 청년들

2018. 9. 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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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미국에 스며드는 사회주의

[한겨레]

▶사회주의의 ‘불모지’, 미국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이들이 11월 중간선거를 위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이라는 조직이 ‘붉은 물결’의 진원지다. 엄청난 소득 불평등을 부른 탐욕스런 자본주의, 민중들의 삶에서 유리된 민주당에 실망한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폭스뉴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매우 편애하는 뉴스 채널이다. 트럼프는 자신에 비판적인 <시엔엔>(CNN)은 “가짜 뉴스”라거나 “이미 죽었다”고 비난하며 시엔엔 기자의 질문 받기를 거부한다. 폭스뉴스에 대해서는 “진짜 뉴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미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뉴스 채널이기도 하다. 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8월 황금시간대의 시엔엔 시청자는 하루 평균 105만2천명인데, 폭스뉴스는 229만9천명으로, 시엔엔의 2배가 넘는다. 매우 보수적이며 친공화당적인 매체다.

사회주의에 대한 의식 변화

이런 폭스뉴스가 지난달 22일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유권자 1009명한테 ‘미국이 자본주의에서 멀어져 좀더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나쁘다고 생각하느냐’고 하고 물었더니, “좋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36%,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51%로 나타났다. 6년 전인 2012년 7월 조사에서는 “좋다고 생각한다”는 답이 20%,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답이 64%였다. 사회주의 쪽으로 더 향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앞서, 지난달 13일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18살 이상 미국인 15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는 더 놀라웠다. 18~29살 젊은층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들이 51%에 이른 반면, 자본주의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이들은 45%에 그쳤다. 2010년부터 2년 간격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 젊은층이 5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처음이다. 2016년 조사 때는 57%였는데, 2년만에 12%포인트 내려갔다.

그동안 미국에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유럽 주요 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좌파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제도권에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선 20세기 중반 이후 매카시즘 등 극단적 반공주의와 사회주의자 탄압 등 여러 요인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했다. 지금도 공화당이 민주당을 공격할 때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그런 미국에서 ‘붉은 물결’이 일고 있다. 더이상 ‘사회주의’는 입밖으로 내서는 안 될 금기어가 아니다.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미국 언론은 이들을 “새로운 사회주의자들” “밀레니얼 사회주의자들” “21세기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미국 청년 51% 사회주의 긍정
자본주의 긍정은 45%에 그쳐
민주당 경선서 사회주의자 돌풍
민주사회주의자들 회원도 급증

빈부격차·민주당에 실망 청년들
사회주의에서 새로운 대안 찾아
지역사회 밀착 풀뿌리 운동으로
세력 넓히며 미 정치에 새 바람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지난 6월26일 연방 하원의원 뉴욕주 제14 선거구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28살 여성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가 10선 의원으로 민주당 서열 4위인 조 크롤리(56) 후보를 15%포인트 격차로 크게 이기면서 주목을 받았다. 브롱크스와 퀸스가 포함된 이 선거구는 민주당 지지가 압도적이어서 11월 중간선거 때 그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또 지난달 7일에는 미시간주 제13 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42살 여성 라시다 탈리브 후보가 당선되면서 사회주의자 돌풍을 이어갔다. 이 선거구에 출마한 공화당 등 다른 정당 후보가 없어 그의 하원의원 당선도 확정적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이민자의 딸이다. 주 의회 예비선거에서도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주당 현역 의원들을 물리치고 후보로 여럿 당선됐다. 인기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배우 신시아 닉슨(52)도 민주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며 민주당 소속의 현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61)에게 도전장을 낸 상태다.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 로고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누구

이들은 모두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이거나 이 조직의 지지를 받는다. 이 단체가 붉은 물결의 진원지다. 정당도 아니고, 민주당내 분파도 아니다. 민주당을 통해 선거에 참여하는 사회주의 운동조직이다. 이 단체는 강령 2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이다. 사적 이윤, 소외된 노동, 부와 권력의 거대한 불평등에 기반한 경제질서, 인종·성·성적지향·젠더표현·장애·나이·종교·출신지에 따른 차별, 현 체제를 지키기 위한 잔인함과 폭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이다. 자원과 생산에 대한 민중 통제, 경제계획, 평등한 분배, 페미니즘, 인종 평등과 비억압적 관계에 기반한 인간적인 사회질서의 비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최근 공식 트위터 계정에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단지 자본주의를 수리하기(fix)를 원하는 게 아니라 대체하기(replace)를 원한다”는 글을 올렸다.

1976년 창간돼 민주사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월간 <인디즈타임스>는 9월호에서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DSOC)와 새미국운동(NAM)이 결합해 1982년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의 뿌리는 미국사회당(SPA)이다. 1910~20년대 전성기 때 사회당은 한때 당원이 11만3천명에 이르고, 연방 하원의원 2명을 포함해 1천여명의 선출직 공무원을 배출하기도 했었다. 노동운동 지도자 유진 뎁스(1855~1926)를 후보로 세워 대통령 선거에도 나섰다. 이후 세력이 약화한 사회당은 1972년 12월 이름을 미국사회민주주의자들(SDUSA)로 바꾸었다. 당시 저명한 사회주의 사상가인 마이클 해링턴(1928~1989)이 이끄는 당원들 상당수가 떨어져 나와 1973년 민주사회주의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1972년 결성된 새미국운동은 1960년대 반문화운동과 신좌파, 페미니즘에 뿌리를 둔 조직이었다.

<인디즈타임스>는 2015년 6천명이던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 회원이 곧 5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했다. 2016년에 15개 지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212개 지부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좌파 조직이다. 이 잡지는 회원 급증의 계기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 출마,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여성들의 행진’(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다음날인 2017년 1월21일 열린 대규모 반트럼프 여성 시위),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의 경선 승리 등 3가지를 꼽았다. 신입 회원은 대부분 밀레니얼 세대(1980~1990년대 출생)다. 회원들의 중간 나이도 6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낮아지며 젊은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청년들 사로잡은 사회주의

<뉴욕타임스>는 ‘소득 불평등’에 맞서 싸우겠다는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의 약속이 많은 청년들을 이 조직으로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소득 불평등이 미국의 형사사법, 의료, 정치 등 모든 분야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여긴다. 갚아야 할 학비 대출금과 치솟은 집세, 불확실한 직업 전망 등을 떠안긴 자본주의와, 일하는 사람들한테서 멀어진 민주당에 대한 실망도 이들을 사회주의로 이끈 요인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청년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자리와 집을 잃고 빚더미에 앉은 반면, 거대 은행과 기업들은 구제금융을 받아 살아난 ‘대마 불사’ 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는 통념에 회의를 품었다. 대학 등록금이 치솟으면서 이들은 앞선 세대들보다 훨씬 많은 빚을 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뉴욕연방준비은행이 지난해 7월 낸 보고서는 등록금 인상에 따른 학비 대출 증가로 청년들의 집 소유가 줄었다고 밝혔다. 학비 대출금은 2009년 이후 두배로 늘어 무려 1.4조달러(1550조원)에 이르렀다. 보고서는 등록금이 2001년 수준에 머물렀다면 28~30살 청년 36만명이 2015년에 집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소득 불평등 문제를 다루는 ‘경제곤경 보도 프로젝트’(EHRP)의 책임자인 얼리사 쿼트는 “요즘 미국 경제가 좋다고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근근이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매일 매일 들어가는 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임금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뱅크레이트’의 지난 6월 조사를 보면, 18~37살 미국인 가운데 절반이 넘는 51%가 “돈을 더 벌기 위해 부업을 한다”고 답했다.

경제 양극화에 대한 분노는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로 분출된 바 있다. 당시 ‘1% 대 99%’라는 구호가 시위를 대표했다. 청년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는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지지로 이어졌다. 브루클린칼리지의 정치학 교수인 코리 로빈은 “1970년대 이후 리버럴들(민주당)은 경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노동자들과 노조, 증세, 재분배, 규제 등을 강조하곤 했었는데, 요즘에는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 같은 억만장자를 대우하고, 가능한 규제를 풀며, 선거철을 빼고는 노조도 멀리하고 있다”며 “수십년 동안 좌파 성향의 유권자들은 대안이 없어서 이들과 함께 했다”고 말한다. 이제,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떠올랐다.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 누리집

지역사회 밀착한 풀뿌리 운동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건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 저녁 시간에 회원들이 모여 마르크스의 책이나 요즘 미국에서 인기있는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을 읽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실천적이다. 지역사회에 밀착한 풀뿌리 운동을 한다. 공립학교가 문을 닫는 날이면 사회주의-페미니스트 위원회는 온종일 학생들을 돌보고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일부 지부에서는 자동차 브레이크 등을 무상으로 교체해주는 행사를 열기도 한다. 파티와 비치 데이, 모금 행사 등을 주최해 지역사회에 소통한다.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의 전국 책임자인 마리아 스바트(38)는 “모든 게 매우 개인화되고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다”며 “사람들은 매우 외롭고, 자살률은 치솟았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선거운동도 직접 유권자를 일일이 방문하는 방식이다. 지난 6월 경선에서 승리한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와 자원봉사자들은 12만번이나 문을 두드렸다. <인디즈타임스>는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 소속 후보와 회원들이 직접 걸어다니며 수십만번 문을 두드리면서 21세기 미국 사회주의의 길을 열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들은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과 공립대학 등록금 폐지, 연방정부 일자리 보장제 등을 내세웠다. 일자리 보장제는 정부가 모든 구직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민간에서 일자리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면 정부가 직접 고용하는 제도다.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은 정부가 국민에게 일괄적으로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건강보험은 민간보험이 중심이다. 최근 <폭스뉴스>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 체제로 가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응답이 46%로, 반대한다(31%)보다 많았다.

민주당은 어떻게

청년 사회주의자들을 보는 민주당 주류의 속내는 복잡하다.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가 경선에서 이긴 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는 “한 지역구에서의 선택일 뿐”이라며 그의 당선을 전국적 차원에서 큰 변화의 흐름으로 보는 것을 경계했다. 민주당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는 후보들로 인해 민주당 지지표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이렇게 짚었다. “더 많은 오카시오 코테즈와 같은 후보들이 저기 있다. 민주당은 이들을 환영해야 한다. 민주당을 친근한 조직으로 재건하는 작업에 그들의 젊음과 열정, 의지가 필요하다. 그들은 오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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