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에 석유란? '복'이자 '독'..남미판 '자원의 저주' [뉴스 깊이보기]

박용필 기자 2018. 9. 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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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달 24일 유엔은 ‘베네수엘라 엑소더스’를 ‘지중해 난민 위기’에 비견했다. 실제 국민의 7%인 230만명이 나라를 탈출했다. 이웃나라 브라질의 접경 지역에선 주민들이 베네수엘라 이민자들에 돌을 던지고 짐을 불태운다. 브라질 정부는 국경지역에 군병력을 배치하기로 했다. 이민자들을 통해 유입된 감염병은 접경국 뿐 아니라 국경을 맞대지 않은 페루에까지 공중 보건 비상 사태를 발령시켰다. 남미에서 가장 난민 친화적인 국가 에콰도르조차 베네수엘라인들의 불법 입국을 막으려 하고 있다.

대탈주의 원인은 경제 붕괴다. 탈주민 230만명 중 130만명이 영양 실조다. 생필품은 물론 먹을 것조차 없다는 얘기다. 이미 8만%를 넘어선 인플레이션은 올해 안에 100만%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고장난 시설은 부품이 없어 못 고치고, 교육과 의료 등 공공 서비스는 붕괴됐다. 퇴치됐던 홍역, 디프테리아, 결핵이 다시 창궐하고, 일부 원주민 부락은 에이즈 감염으로 전멸 위기에 처했다.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건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무능과 부패다. 미국의 경제제재도 요인이다. 그러나 위기 시작의 원인은 바로 매장량 세계 1위인 ‘석유’다. ‘자원의 저주’가 베네수엘라 뿐 아니라 남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베네수엘라 이민자의 자녀들이 지난 24일 페루와 에콰도르 접경 지역의 한 국경 관리 시설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다. 툼베스|로이터연합뉴스


■석유, ‘복’이자 ‘독’

베네수엘라 재정 수입의 96%는 석유 수출에서 나온다. 사실상 석유 수출에만 의지하는 경제 구조다. 제조업은 물론 농업도 불모지에 가깝다. “석유만 내다 팔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세계 1위다. 산유량은 한때 세계 5위였다. 생필품을 만들 필요도,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었다. 석유를 판 돈으로 수입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게 더 쌌다. 다른 산업을 육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유가와 수출량이 받쳐줄 때의 얘기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배럴당 10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마두로 대통령 취임 이후 20달러 선까지 폭락했다. 베네수엘라 석유의 40%를 수입하던 미국은 2014년 셰일 가스 개발에 성공하며 수입량을 80%가량 줄였다. 유가 폭락과 수출량 급감에도 석유 수출을 대체할 산업이 없어 국가 재정이 쪼그라들었다. 생필품, 식량, 의약품을 살 돈도, 만들 능력도 없었다. 사실상 모든 품목에서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마두로 정권의 무능은 화를 키웠다. 공공 지출은 그대로 유지한 채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 돈을 계속 찍어냈다. 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화폐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자원 수출과 소비재 수입 모두에 필요한 달러 수급을 차단하며 치명적 효과를 발휘했다.

사태 악화엔 다른 변수가 작용했지만 본질적으론 국제 유가와 수요의 변동에 따라 국가 경제가 ‘흥했다 망했다’ 하는 구조인 셈이다. 풍부한 자원이 외부 요인에 극히 취약한 경제 구조를 만드는 일종의 ‘자원의 저주’를 부른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중남미 전문가 테리 린 칼 교수는 “오일 붐은 베네수엘라에서 번영의 환상을 만드는 동시에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아이들이 지난 6월27일 마라카이보의 한 교회에서 무료 급식을 먹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자원의 저주’에 발목 잡힌 남미

아프리카에서의 ‘자원의 저주’는 자원의 분배 과정에서의 이전투구나 외세 개입으로 인한 혼란과 유혈사태 등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러나 남미에서는 자원에만 기대다 다른 산업을 육성할 기회를 놓치면서 국가경제가 국제 경기 등 외부 요인에 무방비로 종속되는 게 문제다. 베네수엘라 수준은 아니지만 남미의 다른 국가들도 어느 정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구리 산지인 칠레는 수출액의 절반 이상이 구리다. 브라질은 세계 2위의 철광석 수출국이다. 중남미 국가들의 수출에서 원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기준 76%다. 때문에 국제 원자재 수요와 가격 변동에 따라 국가경제가 휘청거린다.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던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연평균 4.5%에 달하던 중남미 지역 전체의 경제성장률은 원자재 수요가 급감하기 시작한 2012년 2.8%, 2014년 0.9%, 2015년 0.5%로 쪼그라든 뒤 2016년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원자재 가격 변동은 정권의 운명도 좌우했다. 브라질에서의 이른바 ‘룰라 전성시대’는 국제 원자재 가격의 고공 행진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뒤 이은 지우마 호셰프 전 대통령의 몰락도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난이 배경이다.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의 지지율이 2015년 9%까지 추락한 것은 친인척 비리로 인한 도덕성 문제도 있지만 구리 가격 폭락에 따라 악화된 경제 상황도 작용했다.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 2016년 페루와 브라질에서, 지난해 칠레 등에서 잇따라 우파 정권이 출범했다. 핑크타이드(남미의 온건한 사회주의)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핑크타이드의 흥망성쇠조차 국제 경기 변동에 따른 결과라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오는 이유다.

세계 최대의 노천 구리 광산인 칠레 깔라마 지역의 추끼까마따(Chuquicamats) 광산. 게티이미지코리아

■혼자 갖거나 나눠 갖거나

그러나 ‘자원의 저주’는 좌파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에 기대어 산 건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핑크타이드가 본격화하기 전인 2000년에도 중남미 수출에서 원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69%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중남미 국가 상당수가 외환 위기를 겪은 것도 자원에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서니 앨슨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저서 <세계화와 발전전략-왜 동아시아는 앞섰고, 라틴 아메리카는 뒤쳐졌나>에서 “첫번째 세계화 시기(1870년~1913년) 산업 혁명기의 서구 열강에 자원을 수출하며 경제성장률이 세계 평균치를 웃돌던 중남미가 두번째 세계화 시기(1973년~2001)엔 동아시아보다 성장률이 뒤쳐진 이유는 산업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캐나다 일간지 내셔널포스트는 “브라질의 경제는 16세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시절부터 국제 자원 수요 변동에 따라 호황과 파산을 반복했다”고 했다. ‘자원의 저주’가 중남미의 발목을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특히 독재 정권이나 우파 정권 하에서는 자원의 부가 독점되는 경우도 많았다. 베네수엘라도 1980년대 후반 자원의 부가 일부 기득권이나 해외 기업에 집중됐고, 정부가 간섭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빈곤율이 49%에 달할 정도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다. 이는 좌파인 차베스 전 대통령의 집권을 가능케 했고, 그가 기업을 국유화하고 빈곤층에 대한 복지지출을 대폭 늘린 이유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도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대통령 시절부터 누려온 경제 호황의 결실을 국민 전체가 체감할 수 있게 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결국 자원에만 기댄 건 좌파나 우파나 마찬가지였다. 우파는 혼자 갖는 경우가 많았고 좌파는 나눠갖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모두 다른 산업을 육성하는 데엔 실패했거나 소홀했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이 2006년 7월 4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남미 6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당시 브라질 대통령(왼쪽)과 포옹하려하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식민지 경제’의 굴레 벗어던져야

노르웨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역시 자원 부국이다. 2013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남미 국가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재정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9%(노르웨이 등 평균), 24%(중남미 평균)로 차이가 난다. 칠레의 경제지 ‘아메리카 이코노미아’는 “호주·노르웨이·캐나다·뉴질랜드가 했지만 우리는 하지 못했던 건 바로 ‘하나의 큰 부의 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시절 중남미의 경제는 본국에 원료를 공급하고, 그 원료로 만든 본국의 제품을 소비하는 시장으로만 기능하도록 구조화됐다. 학자들은 이런 구조를 ’식민지 경제’라 부른다. 중남미 국가 대다수는 지금도 원료를 공급하고 제품을 소비한다. ‘하나의 큰 부의 샘’이 아닌 작더라도 여러 개의 샘을 만들어내는 것, 원료가 아닌 제품을 공급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 중남미가 ’자원의 저주’라는 ‘식민지 경제’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길이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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