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로 식물인간 된 두 아이 아빠..공무원연금公 "희귀병 탓"

김준희 2018. 9. 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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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립국악원 직원, 심정지로 혼수상태
공단 "업무와 연관 없다"며 요양 승인 거부
가족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서 이겨
법원 "과한 업무로 건강한 30대 가장 쓰러져"
공단 항소..증인 요청 과정서 '겁박 논란'도
2016년 3월 심정지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전북도립국악원 전 단원 최모(41)씨 가족의 단란했던 모습. 부인 서모(45)씨와 아들(12)·딸(9)과 함께 2015년 9월 전주자연생태박물관 실내에서 전주향교를 배경으로 찍었다. [사진 최씨 부인]
5일 전북 전주시 중화산동 한 요양병원. 깡마른 체구의 남성이 침대에 누워 있다. 의식은 없고, 사지는 뒤틀렸다. 목과 콧구멍에는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호스가 꽂혀 있다.

전북도립국악원에서 9급 임기제(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최모(41)씨다. 2016년 3월 21일 오후 4시 7분쯤 전주시 삼천동 한 사거리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 독감에 걸려 병가를 내고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지나가던 운전자가 그를 발견해 119에 신고해 목숨은 건졌다.

병원에 옮겨진 뒤 최씨의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뇌 기능은 멈췄다. 네 가족의 가장인 그가 '식물인간'이 된 지 2년 5개월이 넘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5월 최씨 가족이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공무상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손을 들어줬지만, 힘겨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공단 측이 항소해서다.

앞서 최씨 가족은 2016년 4월 공단 측에 공무상 요양 승인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공무원연금급여재심위원회도 재심을 기각했다. 그러자 지난해 2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공단은 "최씨가 쓰러진 건 그가 앓던 것으로 의심되는 '브루가다 증후군' 탓이고 업무와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브루가다 증후군(brugada syndrome)은 유전에 의한 것으로 심장 발작 및 심정지를 일으키는 희귀 질환이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원고(최씨)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에 심정지가 왔다"며 요양 불승인 처분을 취소했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최모(41)씨 최근 모습. 혼수상태인 그의 목과 콧구멍에는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호스가 꽂혀 있다. 몸이 점점 굳어 사지가 뒤틀려 있다. [사진 최씨 부인]
최씨는 지난 2006년 결혼한 부인 서모(45)씨와의 사이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12)과 초등학교 3학년인 딸(9)을 뒀다. 그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전업주부이던 서씨가 가장이 됐다. 서씨는 현재 햄버거 가게에서 하루 4시간씩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한다. 가끔 방과후 교사 '땜빵'까지 하면 한 달에 100만원을 손에 쥔다. 이 돈으로 남편 병원비와 생활비, 아이들 학비를 대지만, 살림살이가 팍팍하다.

그나마 최씨가 쓰러진 첫해 국악원 동료들이 모아 준 2000만원이 큰 도움이 됐다. 최씨는 심정지로 쓰러진 뒤에도 병가 상태로 6개월간 단원 신분을 유지하다 2016년 11월 계약이 해지됐다.

서씨는 "아이들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하지만 사지가 뒤틀리고 자꾸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 많이 놀랄까 봐 아픈 다음엔 못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항상 '어떤 가정이나 어려움은 있고, 아빠나 엄마가 없는 가정도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2016년 3월 심정지로 쓰러지기 전 건강했던 최모(41)씨 모습. [사진 최씨 부인]
도대체 건강하던 최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법원과 국악원에 따르면 문화저널 기자와 전주세계소리축제 기획자 등으로 일한 최씨는 만 37세이던 2015년 4월 9일 전북도립국악원에 임기 1년의 9급 임기제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업무 실적에 따라 1년 후 재계약할 수 있고, 2년을 채우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리였다.

최씨는 국악원 홍보 업무를 도맡았다. 국악원이 추진하던 공연 유료화도 그가 전담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들끓자 전면 보류됐다. 최씨는 당시 동료들에게 "스트레스가 심하다" "재계약이 안 될까 봐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국악원은 2016년 개원 30주년을 맞아 행사가 많았다. 최씨의 홍보 업무도 급증했다. 실제 당시 그는 월 평균 20~30시간의 초과 근무를 섰다. 게다가 그가 제안한 지정좌석제가 도입 첫날 예매 오류 등으로 항의가 빗발치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최모(41)씨 최근 모습. 부인 서모(45)씨는 뼈만 앙상한 아빠 모습을 아이들이 보면 놀랄까봐 병원에 데려 가지 못하고 있다. [사진 최씨 부인]
서울행정법원 행정11단독 박용근 판사는 "원고(최씨)의 공무 수행과 심정지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의학적 소견을 근거로 삼았다. 최씨의 진료 기록을 감정한 삼성서울병원 측은 "원고에게 심장정지 등을 유발할 기왕증(환자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병)은 확인되지 않는다. 급성심정지의 원인이 있는 경우 과로·스트레스가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재판부는 "원고가 브루가다 증후군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최초 심폐소생술 이후 브루가다 증후군 양상이 사라진 데다 가족 중 급사한 병력이나 심장 관련 질환을 앓던 사람이 없어서다.

이런 이유로 재판부는 최씨의 심장 발작 원인을 그의 '공무 수행'에서 찾았다. 재판부는 "원고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후 기존에 다뤄본 적 없는 공연 유료화 추진, 지정좌석제 시행이라는 업무를 전담했다"며 "게다가 신입으로 국악원 내 최하위 임기제 공무원이었는데도 도지사 등에 대한 보고 업무까지 전담했던 사정을 보면 홍보 담당자로서 스트레스가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단은 항소했다. 이 과정에서 "공단이 전북도립국악원 직원들을 겁박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공단 인사법무실 관계자가 지난달 말 국악원을 찾아 최씨 동료 3명을 만나고, 국악원 직원 1명과 통화를 한 게 발단이 됐다.

국악원 직원들에 따르면 해당 공단 관계자는 최씨를 돕기 위해 탄원서를 쓴 동료들에게 "사실 확인 없이 왜 모르는 내용을 썼느냐" "증인으로 안 나오면 재판 당일 강제로 소환하겠다" "변호사와 노무사를 선임한 것부터 잘못됐다" 등의 발언을 했다.

국악원 직원 김모(47)씨는 "공단 직원이 국악원 직원들을 취조하고 겁박했다"며 분노했다. 국악원 노조도 "공단이 선의를 가지고 아픈 직원을 도운 동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반발했다.

공단 측은 "공무원연금법 등에 따라 항소를 진행하고 있다"고 맞섰다. 논란이 된 인사법무실 관계자는 "탄원서를 보면 개인들이 다 작성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써서 사인만 한 것 같아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을 뿐 겁박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강제 구인' 발언에 대해선 "증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안 나가면 재판부에서 강제 구인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오해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그는 "최씨의 최초 병원 진단서에 나오는 브루가다 증후군은 과로나 스트레스와 관련이 없는 질병"이라며 "항소심에서 증인 신청을 한 이유는 1심에서는 서류로만 최씨의 업무 내용을 확인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국악원 동료에게 직접 물어보려는 취지"라고 했다.

이에 국악원 직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이미 최씨의 업무를 잘 아는 직원들이 공단 측의 사실 조사에 응한 데다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를 1심 법원이 대부분 인용했기 때문이다. 다음 항소심 재판은 오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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