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존립하려면 힘들더라도 이민사회 본격 준비해야"

2018. 9. 6.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짬】노르웨이 오슬로대 한국사학자 박노자 교수

박노자 교수의 글엔 ‘정로환으로 암을 치유하는 것과 같다’와 같은 재밌는 비유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비유는 어떻게 착안했을까? “배탈 날 때마다 한국이나 일본제 정로환을 맨날 먹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제 생활방식이 많이 한국화됐습니다. 한약을 자주 쓰고 한식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꼭 구해서 먹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그런 비유들이 절로 생각납니다. 하하.” 사진 박노자 교수 제공

“책 제목은 출판사쪽에서 제안했어요. 제가 수용한 이유는 이번 촛불 항쟁과 현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만으로도 충분히 전향적인 역사적 전환의 의미가 있다고 봐서죠.” 최근 <한겨레> 기고와 블로그 글을 묶어 <전환의 시대>(한겨레출판)란 책을 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의 얘기다. 이 책은 박 교수의 23번째 한국어 저술(공저 제외)이다. 1998년 첫 책 <한국 고대 불교사>(서울대 출판부)를 냈으니 매년 한 권꼴로 낸 셈이다.

“민중이 일어나 ‘박근혜 극우파 통치’라는 최악을 막아냈으니, 역사적 의미가 있어요. 문재인 정부가 한계는 있지만, 촛불 항쟁의 여열이 남아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지난 4일 늦은 밤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오슬로대 연구실에 있는 박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00년부터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두 아이(16살·7살)와는 노르웨이어와 영어로 소통한단다. 한국 사람인 아내와 대화를 하거나 <한겨레>에 칼럼을 쓸 때 말고는 한국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기회가 없단다. “그나마 한국어 배운 걸 까먹고 있어요. 그래도 고급한국어를 까먹지 않은 것은 <한겨레> 덕분이죠. 예전엔 한국어 논문이라도 썼는데 지금은 한국어 논문 요청도 없어요. (영어 논문을 우대하는) 한국 정부가 학술어로서 한국어 기능을 말살시키고 있어요.”

대학에선 ‘한국 종교·철학사’ ‘한국 정치·사회사’ ‘북한 정치·사회사’ ‘동아시아 종교·철학사’ 등을 가르친다. 그의 글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한국인에 대한 사실이 많이 나온다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외부자의 장점도 있죠. 제가 한국과 중국, 일본을 세트로 팔고 있어요. 하하. 유교라 하더라도 한·중·일을 묶어 큰 그림을 그려 세트 판매를 합니다.” 읽고 쓸 수 있는 언어는 러시아어, 노르웨이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까지 6개란다. 외국어 배우기의 어려움을 물었더니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살다 보니 익히게 되더군요. 친척이 있는 일본에선 몇 개월 산 적도 있고 중국도 가끔 가죠. 일본어를 못하면 한국사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미생물학 전공 교수였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다. “매년 두 번 정도는 러시아를 가죠. 어머니는 저의 국적(한국)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 가족 구성원들만 해도 이스라엘, 미국, 러시아, 핀란드, 우크라이나 등 국적이 5개나 됩니다. 아들이 ‘발언의 자유’가 있는 오슬로대 교수라는 걸 반가워하시죠. 어머니가 받는 러시아 정부연금은 한국 돈으로 매달 35만원 정도입니다. 연금 제도가 있지만 옛 소련에 비해선 부실해요.” 오슬로대늬 교수 평가제도는 어떨까. “평가요? 없어요. 그냥 공무원이죠. 노르웨이 피고용인의 3분의 1이 공무원입니다. 다만 여행보조금 같은 경비 지급을 할 때는 평가를 합니다. 이땐 대중적인 글도 포함하고 논문도 언어를 따지지 않아요.” 그는 한 달에 평균 두 차례 정도 대학 지원으로 외국 출장을 간다고 했다.

글쓰기에 도가 튼 전문가도 신문 한 면을 채우는 대형 칼럼 쓰기는 만만찮은 일이다. “통계나 국가지표 사이트,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검색 사이트에서 기사에 쓸 통계를 확인해요. 칼럼 한편 쓰는 데 7~8시간이 걸리죠. 한국이 인터넷 통계 사이트는 잘 돼 있어요.”

그는 이번 책을 두고 “우리가 정말 바꾸지 않으면 안 될 대한민국 기본골격에 대한 탐구의 시도”라고 했다. ‘병영사회, 여성혐오사회, 노동지옥사회, 재벌 왕국, 위계와 서열의 사회.’ 그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다.

<전환의 시대> 표지

한국인이 된 뒤 17년이 흘렀다. 그간 한국 민중의 행복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민중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은 그대로죠. 크게 봐서 한국은 경쟁, 격차, 불안, 위험 사회죠. 한국 직장인의 평균 근속연수가 4년 반밖에 안 됩니다. 오이시디 국가 평균의 절반이죠. 90년대 말엔 평생 고용에 대한 희망의 싹이라도 있었죠. 이젠 희망도 없어요. 좋아진 점은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90년대 말엔 초중고 아이들에 대한 체벌이 일상적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근절됐어요. 매우 기쁜 일입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결정했잖아요. 그땐 그런 단어도 없었어요. 2000년까진 성 소수자란 단어도 없었고 변태라고 했죠. 엄청난 개선이죠.”

그는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경쟁;이 국시가 됐다고 했다. “이미 순위가 예정된 경쟁이죠.” 민중의 행복을 키우기 위한 네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가 상시고용은 원칙적으로 정규직으로 하는 비정규직 법 개정이며 두 번째는 공공임대주택의 대대적 공급이다. “민간 부문에 비정규직 사용 제한을 두어야 합니다. 계절노동이나 대체 자리엔 임시직을 둘 수 있겠지만 이런 예외를 제외하곤 가능한 정규직을 써야 한다고 (국가가) 기업에 강요해야 합니다. 노르웨이 비정규직은 9%가 되지 않아요. 북유럽은 15%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줄여야죠.” 셋째는 국공립대 평준화다. “국공립대를 통합해 사람들이 서울대가 뭔지 까먹도록 해야 합니다. 제주대가 1번 공립대가 되고 서울대가 18번 공립대가 되는 것이죠. 노르웨이를 보면 (같은 공립대인) 오슬로대나 베르겐대나 어디를 나오든 차이가 없어요. 학생들이 편하게 선택하죠.” 마지막은 이민사회를 준비하는 것이다. “유엔 보고서를 보면 30년 뒤 한국 인구가 3600만 명으로 줍니다.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령 인구를 돌볼 사람도 없어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복지가 좋은 독일도 출산율이 1.5 정도이며, 복지가 가장 좋은 노르웨이도 1.8에 불과해요. 복지를 아무리 개선해도 인구의 자연재생산이 불가능해요. 고용허가제를 없애고 노동이민제를 도입해야죠. 중국과 베트남 사람이 들어와 한국인이 되지 않는 이상 한국은 장기적으로 존립이 불가능해요. 힘들겠지만 심리적 준비를 해야죠. 사실 이게 가장 힘들어요. 하지만 망하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고도 산업 사회는 이민사회가 되지 않으면 존립이 불가능해요. 노르웨이도 매년 5만 명씩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인구가 줄었을 겁니다. 제가 재직 중인 학교와 학과 교수의 절반이 이민자입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전철이나 택시 운전사도 다 이민자죠.”

그는 귀화 이후 한국의 군사주의 문화에 날 선 비판을 해왔다. “한국에선 아이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잖아요. 노르웨이 사회라면 ‘100년의 스캔들’이 될 겁니다. 아동학대죠. 법적 규제가 필요합니다.” 덧붙였다. “한국 군사주의의 가장 큰 근원은 남북 문제입니다.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군사주의 문화의 합리적 기반입니다. 남과 북이 조금이라도 군축을 시작한다면 군사주의 문화 근절에 도움이 될 겁니다.”

최근 ‘한겨레’ 칼럼·블로그 글 등 모아
한국어 23번째 책 ‘전환의 시대’ 펴내

“촛불항쟁과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전향적인 ‘역사적 전환’ 의미 있어
남북 군축 ‘병영문화’ 개선 도움될 것
한국 국시는 ‘경쟁’…순위는 이미 정해져”

군사주의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고교 때부터 시작됐단다. “옛 소련에서 고교를 다닐 때 급우들의 형인 아프가니스탄 참전 군인들을 많이 봤어요. 심신이 다 일그러져 있더군요. 옛 소련 아프간 침공 군대의 병영 내 기합 행위가 매우 극단적이었거든요. 아프간 빨치산에 대한 살의를 북돋우기 위한 방편이었어요. 그때부터 군대 제도에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전쟁보다 병영이 더 지옥이란 걸 알게 되었죠.”

한반도는 평화를 맞을 수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남과 북 모두 관계 개선을 필요로 한다는 게 희망의 요인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점수를 가장 쉽게 딸 수 있고 그것도 많이 딸 수 있는 게 바로 남북관계죠. 집값이나 고용 문제는 기업집단의 이해관계와 충돌해 쉽지 않아요. 남과 북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군축에 합의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점수를 엄청 딸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은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한국자본을 원하고 있어요. 북한의 의도는 이이제이입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하겠다는 것이죠.” 덧붙였다. “지금 국면에서는 대북 제재를 푸는 게 중요해요. 한국 정부가 중·러와 힘을 합쳐 일단 제재를 푸는 쪽으로 미국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외교술에 장점을 보인다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문 대통령이 국내 문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요. 하지만 변호사 출신이라 외교술은 뛰어난 것 같아요.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냈잖아요?.”

가장 애착이 가는 한국어 텍스트를 묻자 박노자 교수는 백석의 시집을 꼽았다. “백석 시를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요. 그렇게 맛깔스러운, 그야말로 ‘맛있는’(?) 언어를 다른 시인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워요. 제 글 중엔 아무래도 <우승열패의 신화>(2005, 한겨레출판)입니다. '우승열패'는 여전히 한국인의 주된 생활 코드이죠. 이 문제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어요.” 사진 박노자 교수 제공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선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철학적으로 보면 완벽한 근대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남한) 근대는 경쟁 속에서 사람을 지치게 하는 근대죠. 음식 쓰레기도 많고요. 미국은 학생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 학교에 가야 하는 근대죠. 북한엔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가 없어요. 하지만 장점도 있어요. 주택이 거의 공짜죠. 주택 공급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교육과 의료 무상화를 한 지도 반세기가 넘었어요. 남과 북이 서로 객관적으로 보면 나쁠 게 없어요.”

그는 망한 사회주의 국가 출신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과 연대의 마음을 갖게 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 조국이 망한 뒤 바로 자신이 사회적 약자가 됐다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옛 소련에 살 때 관심사는 한국 고전문학이었어요. 한시도 엄청 좋아했죠. (조선 후기 여항 시인) 추재 조수삼의 시를 특히 좋아했죠. 정치에 관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옛소련이 망한 뒤엔 국가 재산을 훔친 도둑놈들을 빼곤 다 사회적 약자가 됐어요. 옛소련 말기 대학을 다닐 때 제가 학점이 좋아 노동자 임금의 70% 정도 되는 장학금을 받았어요. 그런데 나라가 망한 뒤 이 장학금이 휴짓조각이 되더군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 4곳에 출강했는데 아내가 상점 2~3군데를 돌면 강의료가 바닥이 났어요. 당시 알바를 6년 동안 했는데, 한국 관광객 가이드를 하면 달러로 받으니 3~4일 하면 한 달을 버틸 수 있었죠.” 당시 가이드로 맹활약하던 박 교수의 모습은 고 최인훈 작가의 소설 <화두>에도 매우 인상 깊게 소개되어 있다. 그는 <화두>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최인훈 김승옥 윤후명 작가의 가이드를 했어요. 작가 가이드는 목사나 사업가보다 나았어요. 작가 가이드 일은 당시 저에겐 ‘산소 흡입’과 같았죠.”

이런 경제적 궁핍은 박 교수를 1997년 한국으로 이끌었다. “한국에 오니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죠. 노동자가 형벌이라면 외국인 노동자는 가중형벌이더군요.” 노르웨이에서 정규직을 얻기 전에 그는 경희대에서 3년 동안 강사 생활을 했다.

한시 애호는 여전한지 물었다. “지금도 좋아해요. 한시는 최근까지 살아있는 문화죠. 김일성도 죽을 때까지 한시를 지었어요. 마오쩌둥도 평생 한시를 지었고요. 수준도 높았죠. 호찌민은 아예 시인이었어요.” 한시를 직접 짓기도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운을 못 맞춥니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중국 당나라 시인 왕유라고 했다. “개인이 사회와 보조를 맞출 때도 있어야 하지만 거리를 유지할 필요도 있어요.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왕유의 시는 사회와의 거리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그의 시는 인생을 위에서 조감하도록 만들어주죠. 불자인 왕유의 시는 선불교적이기도 해요.”

그는 유대계이지만 ‘불자’이다. “고교를 다닐 때 러시아어로 된 <법구경>을 읽어 그 진리성을 통감했어요. 신자라기보다는 인과응보, 십이연기, 사성제와 팔정도의 철학적 ‘논리’를 수용하는 것이죠. 노르웨이에선 종교 생활까지는 제대로 못 하고 그저 여유 날 때마다 독경하고 참선을 합니다.”

‘인생의 책’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과 에리히 프롬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정규직도 자본주의에선 임금 노예에 불과하죠. 생산과 소비 기계입니다. 프롬은 인간이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가 되려고 애쓰는지 본격적으로 심리 연구를 했어요. 왜 임금 노예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조직에 속해 있지 않으면 왜 불안해하는지 탁월하게 파악했어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 정도는 읽어야 합니다.”

박노자 교수는 학부 시절 한국사를 북한에서 나온 <조선 통사> 시리즈로 배웠단다. “학부 때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 박사의 저술도 읽었어요. 이지린의 고조선 연구나 최익한의 다산 연구 등 1950~60년대 북한의 한국사 연구는 남한보다 수준이 높았어요. 석사 때 지도교수인 니키티나 선생이 북한 사람들과 엄청 친했어요. 향가 연구를 많이 한 벽초 아들 홍기문 박사와도 친했죠. 덕분에 저도 홍 박사가 쓴 향가 연구를 읽었어요.” 사진 박노자 교수 제공

그는 신채호 평전을 집필 중이다. “내년까지는 어떻게든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왜 신채호일까? “신채호는 아나키즘을 택했어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면 옛 소련에 예속된다는 생각에 그런 선택을 했죠. 여러 얼굴을 가진 매력적 사상가입니다. 유림에서 출발해 민족주의자를 거쳐 아나키즘으로 갔어요. 유림이란 보편에서 민족이란 특수를 거쳐 아나키즘이란 보편으로 간 것은 합법칙적 주기를 따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사회와 늘 불화했죠. (그런 점에서) 존경스러워요.”

학자의 길을 가는데 유대계라는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었다. “요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계 사람들에 대해 저지르는 패악을 보면 ‘유대계’라는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요. 그런데 ‘유대계’로서의 특징을 꼽자면 하나는 세계성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곳곳에 다 사니까요. 제 가족도 5개국 국적자들이 있죠. 그래서 절로 ‘국경’을 덜 중시하죠. 또 하나는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심리 같은 것입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세계유대인 인구의 절반 이상을 말살시켰으니까요. 그래서 거의 체질적으로 ‘국민총화 단결, 멸사봉공’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소름이 끼치죠. 물론 박정희의 유사파시즘을 히틀러와 단순 비교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뿌리는 사상적으로 같으니까요.”

한국사 전공자로서 정해놓은 필생의 목표가 있다면? “한국 역사 속에 묻힌 목소리들이 많잖아요. 1920-30년대 공산주의 운동은 북한도 외면했죠. 종파주의란 딱지를 북에서 붙였죠. 남한에서도 알려지지 않았어요. 공산주의 운동가는 그나마 경찰 조사 자료라도 조금 있지만 빈민, 여성, 어린이, 장애인, 화교 같은 ‘비국민’의 역사는 덜 밝혀져 있어요. 자료 찾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힘이 닿는 대로 한국적 토양에서의 서발턴(하위 주체) 연구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언젠가 “지식인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삶을 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명심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박 교수 눈에 비친 한국 지식인의 모습은 어떨까. “한국에서 지식 자본과 문화 자본은 신분 상승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지식과 문화 자본을 가진 이들은 민중과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들은 (로마 시대에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는) 호민관이 못 되고 (로마 시대 최고통치자인) 집정관이 되는 것이죠. 지금 청와대에도 예비 호민관이었던 운동권 출신들이 많아요. 결국 통치자로 귀결되었죠. (한국 지식인들에게) 벼슬길은 자석과 같아요. 저는 지식인들이 직업 의식이라도 투철했으면 좋겠어요. 가르치고 글을 쓰는 일을 자기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두 아이의 꿈을 물었다. “막내는 7살이라 아직 꿈은 새 장난감을 얻는 데 그칩니다. 첫째는 이미 고1인데 지금 꿈이 투자자, 즉 자본가입니다. 저는 찬동하기 어려운 인생의 항로지만, 만류하려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 인생을 알아서 살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구운몽>의 주인공처럼 홍진(紅塵·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허무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 속에 한 번 들어가 봐야 하는지도 모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