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압수 '조선말큰사전 원고' 서울역 창고서 발견되다

2018. 9. 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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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73년 전 1945년 9월8일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서 <조선말큰사전> 초고 발견

[한겨레]

<자유신문> 1945년 10월 6일 치(왼쪽), 경성역(서울역) 내부 플랫폼과 화물창고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사람 따라 “말”까지 옥살이

창고에 갇혔던 ‘우리 사전’ 해방된 원고

오늘로부터 73년 전,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8일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가 발견됐다. 무려 2만6500여 장 분량의 방대한 양이었다.

한글학회 창립터(1908년 국어연구회 창립터인 현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1959년 7월 19일 기념사진을 찍은 한글학회 회원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원고를 손에 든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 사전 편찬의 결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인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1942년 경찰에 압수돼 3년 동안 그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어렵게 되찾은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중단됐던 조선말 사전 편찬 사업에도 다시 희망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1941∼1942년에 작성한 원고 수정본(제3권).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광복 이후에도 한국전쟁과 한글파동 등 여러 사회적, 정치적 혼란기 때마다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말 큰 사전>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글학자들의 민족의식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뒤 1945년 해방되기까지 3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말을 빼앗기고 한글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일본은 한글 연구를 한 학자들을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민족주의자들을 요시찰인으로 간주해 감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5년 표준어 사정 제1차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일본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학자들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본격적인 움직임은 1929년 10월31일 한글날 기념일에 각계 인사 108명이 모여 결성한 ‘조선어 사전 편찬회’에서 시작했다. 편찬회는 기존의 조선어학회와 함께 효율적인 사전 편찬을 위해 철저하게 업무를 분담했다. 이들 단체는 각종 어휘 수집 등을 통해 외래어 표기법 통일은 물론, 조선총독부의 철자법 개정안을 스스로 수정했다. 마침내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1년 무렵의 사전편찬실 모습.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이처럼 사전 편찬 사업은 한글학자들에 의해 결성된 대규모 단체의 주도로 진행했다. 이는 단순히 조선어 사전을 만든다는 차원을 넘어서 민족운동의 결과물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기 위해 한글학자들이 겪어야 했던 대가가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한글학자들의 수난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강점기 교육. 문장보국 기치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홍보한 대구 <조선민보>. <한겨레> 자료 사진.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일왕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를 위해 특히 중시했던 것이 바로 ‘일본어 상용 강제’였다. 일본은 1938년 3월부터 조선 각급 학교의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대신 일본어로 된 교과서와 일본말을 강제했다.

일본의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이 가속화할수록 우리 말과 글에 대한 한글학자들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조선어학회는 1942년 3월 <조선말 큰 사전> 원고 일부를 인쇄하면서 분실을 염려해 한 벌을 더 만들어 두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의 감시를 피해 원고 인쇄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10월,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국경지역의 전경. 평화로운 산속마을의 모습인데, 한쪽구릉에 난데없이 총을 든 일본병이 버티고 서서 어색하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일본 유학생이었던 박병엽은 함경남도 흥원읍 전진역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일본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평소 반일 감정이 컸던 박병엽은 일본 경찰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답했고, 이로 인해 가택 수색까지 당하게 된다. 문제는 박병엽 가택에서 발견된 조카 박영희의 일기장이었다. 박영희는 당시 함흥 영생여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8살의 학생이었다. 박영희는 2학년 때 일기장에 한글로 감상적인 글을 적었고, 일본 경찰은 그것을 트집 잡아 수사에 착수했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일본 경찰은 박영희의 증인으로 그의 교사였던 정태진을 소환해 갖은 고문을 가했다. 정태진은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다. 정태진을 시작으로 한글학자 33명이 줄지어 검거됐다. 증인으로 붙잡혀간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검거와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발이었다. 한글학자 가운데 감옥에 구금된 29명은 물 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불로 지지기 등의 악형을 당하며 억지 자백을 강요당했다. 일본은 결국 이들을 엉뚱한 일에 연루시켜 치안 유지법 제1조에 해당하는 내란죄로 몰았다. 당시 흥원경찰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글학자들을 재판에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던 한글학자들은 감옥에서 시를 쓰며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다.

인고의 사전 편찬은

지사들이 외로움을 다한 일이라네

이것도 죄를 지은 일이라면

끝내 시황제의 손에 불살라지리라

목을 놓아 통곡하고파

어이하여 이렇게 갇혀 있는가

깊은 밤 감방에서

홀로 누워 눈물 떨구네 (중략 )

-이극로 <함흥형무소에서 >

해 두고 헛 읽으니 이룬 일 무어런고

이룬 일 전혀 없고 죄만은 가볍잔네

16세의 남아 원한은 크고 큰데

무심한 저 하늘을 소리조차 없구나

망국한 섧다고 하거늘 아비 또한 돌아가니

망망한 하늘 아래 내 어디로 가잔말고

한 조각 외론 혼이 죽잖고 남아 있어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

-정태진 <흥원의 감옥에서 >

결국 일본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를 빌미로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조선어학회의 모든 회원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수십만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해 조선어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조선어학회사건 판결문.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한글학자들은 판결에 불복해 즉시 상고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6명은 수감되고, 이 가운데 2명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사람따라 말까지 옥살이

1945년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한글학자들은 중단했던 <조선말 큰 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사전 원고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원고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말 사전의 편찬이 다시 수십 년간 미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함흥에서 서울로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이 태워 없앤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조선말 큰 사전> 제6권의 표지.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그러는 사이 서울역 창고에서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가 발견되자 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알고 보니 <조선말 큰 사전>을 서울역 창고로 무사히 옮겨 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한글학자들이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이들은 판결에 불복, 상고했다. 이에 따라 증빙 자료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송했던 것이 전쟁 말기 경황없는 가운데 그대로 창고에 방치되었다. 앞서 의미 없어 보였던 ‘판결 불복 상고’라는 법정 투쟁이 결국 <조선말 큰 사전> 원고를 지켜내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모진 탄압에도 끝까지 맞섰던 한글학자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쟁 중에서도 감행한 조선말 사전 편찬

<조선말 큰 사전> 제1권과 제2권.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를 손에 든 한글학자들은 먼저 원고의 정리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억압과 인력 및 경비의 부족으로 만든 사전 원고는 보완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휘의 통합과 분리, 추가, 삭제 등 원고의 전면 손질에 들어간 지 2년여가 지난 1947년 10월9일, 첫 번째 <조선말 큰 사전>이 발간됐다. 총 원고 분량의 약 6분의 1 가량을 탈고한 결과물이었다. 조선어학회와 출판사는 첫 번째 사전의 출판 때부터 책값을 싸게 책정해 구독자가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독립신문> 1948년 2월 6일 치.

이후 1949년 5월 둘째 권이 발행되었다. 1950년 6월에는 셋째 권이 제본 중이었고, 넷째 권은 인쇄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뜻하지 않은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은 북한군에게 함락되어 조선어학회가 위치한 을지로의 새 회관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전쟁으로 인쇄는 중단되었고, 조선어학회 이사장 집에 있던 4, 5, 6권의 원고 또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글학회 (옛 회관).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이에 10여 명의 한글학자들은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옛 회관에 숨겨둔 원고를 한 달 동안 베껴 쓰고 또 베껴 써 두 겹 독으로 땅에 묻었다. 원본은 천안으로 옮겨 땅속에 따로 묻어두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12월에 베껴 쓴 제6권 원고의 일부(왼쪽), 1953년 전주에서 수정한 제5권 원고의 일부.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한글학자들은 피난 중에도 사전 편찬 집무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28일까지 넷째 권 원고 교정을 마칠 수 있었다. 1953년 1월7일부터는 전주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다섯째, 여섯째 원고에 대한 수정도 계속해 나갔다. 결과물은 5월26일 완성되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한글 파동 사건’

이승만 대통령. <한겨레> 자료 사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도 중단하지 않았던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은 뜻하지 않은 변수를 맞는다. 1953년 4월27일에 이승만 독재 정권은 한글 간소화를 강요하는 훈령을 공포한다. 이른바 한글파동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강행하기 위해 당시 문교부 장관인 김법린을 물러나게 했다. 아울러 한글학회의 큰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던 미국의 록펠러 재단 물자도 막아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유네스코의 한글학회 사업 5개년 계획 원조도 외면했다.

하지만 정부의 ‘한글 간소화’ 정책은 사회 각계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권력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도 더 이상 정책을 강제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55년 9월19일 대통령 담화로 한글 간소화 정책을 포기했다.

제3권 초판본 수정본. 1950년 6월 발행 후 1957년 5월 재발행.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지원단체인 미국의 록펠러 재단도 원조를 재개했다. 1956년 4월26일에는 록펠러 재단의 문화부장인 파스 박사가 한글학회를 내방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1월까지는 인쇄용 원조 물자가 여러 차례 배편으로 도착하기도 했다. 한글학회가 조선어 편찬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회는 흩어졌던 편찬원들을 모으고 증원을 통해 4권의 지형 수정과 5권, 6권의 원고 수정을 병행했다.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파손 또는 분실된 1권~3권 지형을 보완하고, 큰 사전 6권 전질을 망라하는 총괄 부록을 작성한다.

우리말 큰 사전 완간의 의미

<우리말 큰 사전> 제1권∼제6권 전권(1957년).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마침내 1957년 10월9일, 민족의 염원이자 얼이 녹아든 <우리말 큰 사전>이 28년 만에 완간되었다. 그런데 사전에는 일반 어휘 외에도 주요 전문 용어와 유명한 땅 이름, 책 이름, 명승고적의 이름도 망라해 편찬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당시 우리의 지식을 담은 사전이나 백과사전 하나 없던 상황에서 국민들의 편익까지 생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완간한 <우리말 큰 사전>은 총 17권으로, 이 가운데 12권은 한글학회에서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5권은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태진과 조선어학회 사건 > 한글학회

<한글학자들의 겨레사랑 >국립중앙박물관

<조선말 큰사전 원고> 등록문화재 제 524-1호

<국사관논총 제 105집>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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