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정말 변했나

반기웅 기자 2018. 9. 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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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재벌개혁 미온적 행보에 실망…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미흡

“김상조 위원장이 변한 지는 오래됐다. 그래도 김상조를 믿었고 일단 지키자는 생각으로 기자회견(지난해 6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관련)에 나섰다. 지금은 그때 한 행동이 잘한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이 전화 통화로 <주간경향>에 밝힌 말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 이상훈 기자

사라진 데드라인 한때 박 위원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김상조 위원장의 옆에 서 있었다. 지난해 6월 박 위원장을 포함한 ‘김상조를 아끼는 사회 각계인사 498명’은 국회 정론관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김상조 후보자는 논문 표절 논란으로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으로부터 ‘파렴치한 인물’로 찍혀 뭇매를 맞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김상조 위원장 후보자의 스승과 동료들이 직접 ‘김상조 구하기’에 나섰다. 하지만 불과 1년 3개월 만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바라보는 시민사회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대와 달리 재벌개혁 성과가 미흡하다는 게 그 이유다. 시민사회의 쓴소리는 김상조 위원장의 표현처럼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이 부른 섣부른 비판일까.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이자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인 재벌개혁의 총대는 김 위원장이 멨다. 김 위원장은 개혁방식으로 장기전을 택했다.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가진 첫 4대그룹 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은 “몰아치듯 기업개혁을 하지 않겠다”며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시간을 줄 때 스스로 변하라는 메시지였다. 종종 김 위원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업의 개혁 ‘데드라인’이 언제까지인지 언론을 통해 알리는 방식으로 기업을 압박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김 위원장이 정한 기한을 지키지 않았다. 취임 후 김 위원장이 내세운 첫 번째 데드라인은 지난해 12월이었다. 지배구조 개선 등 개혁대상인 대기업집단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데드라인은 ‘가이드라인’에 그쳤지만 김 위원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12월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은 영국가수 알 스튜어트의 <베르사유 궁전>의 한 구절인 “우리는 아직도 그날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다(And still we wait to see the day begin)”를 들려주며 개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위원장이 정한 두 번째 데드라인은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열리는 지난 3월까지였다. 이번에는 기업들이 움직였다. 3월 28일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 합병을 골자로 하는 기업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고, SK그룹 등 15개 대기업집단도 소유·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두고 “시장의 요구에 부응해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환영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기업들이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한 김 위원장과 시민사회의 평은 엇갈렸다. 김 위원장이 공직에 오르기 전에 몸담았던 ‘친정’과 같은 경제개혁연대는 <그룹별 지배구조 개선안의 내용 및 향후 과제> 보고서를 통해 “각 그룹들이 내민 개선안은 최소한의 조치만을 담은 소극적 방안”이라며 “그룹들의 소유·지배구조 개선 의지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앞서 경제개혁연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차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100점 만점에 10.5점이라는 박한 점수를 매긴 바 있다. 재벌개혁 분야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혹했다. 경제개혁연대가 평가한 문재인 정부의 첫해 재벌개혁 점수는 0점이었다. 재벌 소유·지배구조 관련 세부과제인 기존 순환출자 해소와 자사주 의결권 부활 방지 등이 하나도 이행되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성과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던 공정위로서는 시민사회의 개편안에 대한 뜨뜻미지근한 평가와 별개로 기업들의 개편 움직임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을 위한 주주총회를 일주일가량 앞두고 주총을 돌연 취소했다. 추진 중이던 지배구조 개편안 역시 무산됐다.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 등이 분할 및 합병 비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의사를 밝힌 게 이유였다. 개편안을 철회한 현대차는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공정위로서는 곤혹스런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재벌의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해야 할 대표적인 기업으로 현대차를 언급해 왔다.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백지화로 공정위는 재벌개혁의 첫 성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례를 잃게 됐다. 공정위의 기대와 예측이 모두 빗나가면서 체면을 구긴 셈이다. 당초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했던 공정위는 지배구조 개편이 무산되자 “지배구조 개편방안은 그룹과 시장에서 결정하는 사안”이라며 선을 그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 공유지내 기린캐슬에서 대학 교수들과 시민들이 모여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개혁 골든타임 놓쳤나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 철회를 기점으로 시민사회는 김 위원장의 미온적인 개혁 행보에 실망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비판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김 위원장은 6월 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경직성 탓에 정부의 개혁이 실패할 수 있다”며 진보진영이 비판에 자중해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발언 이후 시민사회의 반응은 더 냉랭해졌다. 김남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은 “시민사회에서 생각하는 재벌개혁 목표는 높은데, 공정위는 총수 일가 사익편취 분야만 들여다보고 있다”며 “시민사회와 공정위 중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데, ‘내가 시민단체보다 많이 아니까 내가 맞다’는 방식은 현명하지 못한 태도”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대기업의 셀프 개혁을 기다리는 사이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집권 초기 높은 지지율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할 재벌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박상인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은 “정부가 출범하고 1년이 지나면 재벌들이 누굴 구워삶아야 할지 다 안다”며 “아주 집요하게 대통령 측근을 대상으로 로비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대통령이 개혁 지시를 하면 측근들이 다 발목이 잡혀 있어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소통 채널을 막고 국내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뜻을 전하고자 지난해부터 수차례 간담회 요청을 해봤지만 답이 없었다”며 “완전히 무시를 당하다가 지난 6월에 한 차례 비공개 간담회를 가졌는데, 답은 듣지 못하고 핑계만 듣다 왔다”고 말했다.

지난 7월 18일 진보진영 학자 323명이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했다. 진보진영 학자들은 ‘개혁’을 원하는 촛불민심을 기저로 수립된 문재인 정부가 초심을 잃고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개혁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이 제시한 문제 가운데에는 미진한 재벌개혁도 포함됐다. 현 정부가 지난 1년간 기다리기만 하다 재벌개혁에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각계 전문가 집단인 학자들은 기자회견을 빌리지 않더라도 청와대나 공정위에 우려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굳이 기자회견 형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이미 삼성 개혁과 부동산 보유세, 최저임금 관련해서 수차례 뜻을 전달했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며 “문재인 정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사실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김상조 위원장이 지난해 6월 인사청문회에서 낙마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을 실어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지지세력 이탈 가속화 이쯤되자 김 위원장도 느긋하게 재벌의 ‘자발적 개선’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됐다. 김 위원장이 빼든 칼은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이다. 지난 7월 ‘공정한 사회를 위한 재벌개혁의 법적 과제’ 학술대회에 참석한 김 위원장은 “대기업의 자발적 개선을 촉구한 뒤에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법을 개정해 재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상조식 재벌개혁은 돌고 돌아 ‘법’으로 귀결된 셈이다.

지난달 공정위는 지난 1년 동안 벌인 대기업 내부거래·공익법인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을 발표했다. 개정안은 당초 공정거래법 전면개편 특별위원회가 예고한 초안에 비해 규제의 강도가 상당히 낮아졌다. 대표적으로 대기업계열 금융계열사의 단독 의결권 행사 한도를 5%로 설정하도록 한 권고안은 개정안에 담기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해당하는 사례가 딱 1개사(삼성)밖에 없다”며 “예외적 사례를 규율하기 위해서 공정거래법에 너무 과도한 어떤 규제를 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고 반문했다. 보수진영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개정안을 비판하고 있다. 전속고발권 부분 폐지와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로 대기업의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개정안은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지난 8월 24일 김 위원장은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안’ 내용을 발표한 사전 브리핑에서 “개선안을 두고 ‘너무 기업을 옥죈다’, ‘너무 약하다’와 같은 상반된 비판이 제기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김 위원장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김상조식 재벌개혁을 놓고 시비가 이어지는 사이 시민사회는 빠르게 등을 돌리고 있다. 김 위원장이 불을 지핀 ‘성과 조급증’ 논란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사회·경제 이슈를 접한 분들은 이미 재벌개혁에 대한 기대를 다 접었다”며 “김 위원장이 추구했던 주주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신자유주의와 의미가 같아졌기 때문에 지금 행보는 당신(김 위원장)이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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