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취재파일] 박원순은 왜 '집값 폭등 장본인'을 자처했나?

노동규 기자 2018. 9. 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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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그린벨트 풀라" 압박..'개발주의자' 오명 쓰고 동반 침몰은 최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의도·용산 통개발 보류'를 선언한 지 2주일이 됐다. 예정에 없던 휴일 회견으로 '집값 폭등 장본인'을 자처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얼핏 자해적으로 보인 발표는 어떻게 나왔나. 박 시장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 "집값 폭등은 박원순 탓"…과녁 된 박원순

우선 상황이 박 시장에게 좋지 않았다. "여의도·용산을 신도시급으로 통개발한다"는 건 분명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난개발은 안 된다'는 박 시장 지론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이 즉각 반응했다. 발언 다음 주, 영등포구와 용산구는 각각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 1·3위를 기록했다. 강남부터 꿈틀대고 있던 부동산 시장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다.

박 시장으로선 억울했다. '미친 집값'을 잡는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정말 투기 세력이 문제라면 다주택자에게 무거운 보유세를 물리면 된다. 세금 기준인 주택 공시가격을 현실에 맞게 올리면 된다. 그런데 모두 정부 권한일 뿐, 서울시장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투기 세력에겐 자신의 '통개발' 발언보다 먼저 정부가 내놨던 종합부동산세 개편안이야말로 '이제 뛰어 놀라'는 신호였다. 오히려 서울을 멋지게 개발하는 것이야 말로 시장의 마땅한 의무였다. 경전철 재정 착공 등 이른바 강남·북 균형 발전안도 그렇게 나왔다.

하지만 할 일 했다는 박 시장 뜻과 무관하게 상황은 더 나쁘게 돌아갔다. 국토교통부 장관이 국회에 나가 '집값 폭등은 박원순 탓'이라고 대놓고 공식화하자 흉흉했던 민심의 화살은 박 시장을 과녁 삼았다. 아파트 거래가도 강북 외곽까지 연일 최고가를 경신했다.

● 다시 나온 '엇박자론'에 부담…"심야회의서 푸념"

지방선거 때도 발목 잡은 예의 '엇박자'론도 부담이었다. 자신 곁에서 일했던 청와대 인사까지 날마다 '접으라'며 권력의 의중을 전해왔다. 늘 그랬듯 측근들도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건 좋지 않다'며 개발 보류 발표를 종용했다.

개발 철회 발표 전날 밤, 측근과 서울시 간부 등 10여 명이 모인 회의에서 박 시장은 '세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내가 포기하면 집값이 잡히는가?' '집값 폭등 책임서 박원순이 자유로워지는가?' '서울시장이 서울 개발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뻔했다. 시중에 1천조 넘는 유동성이 풀려 있는 상황서 집값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를 말할 때 '서울시장 박원순'은 영원한 레퍼런스로 남게 된다. 노후주택 사는 시민들은 다시 기약 없이 재개발·재건축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시장 혼란만 부추겼다는 비난을 감수한 긴급 기자회견은 이런 상황서 나왔다. 수도 최고 행정가가 야심차게 발표했던 개발 계획을 "예상치 못한 부동산 투기와 과열이 일어났다"며 스스로 주워 담았다. 식언은 정치인으로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SNS로 발표하자는 방안도 있었고, 조용히 눙치며 속도만 조절하자는 안도 있었지만 정공법을 택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집값 폭등 책임을 뒤집어쓰고 체면도 구겨지지만 문재인 정부 성공과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서라며 박 시장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 치욕스런 회견으로 반전?…그린벨트 해제 압박 견딜까

사면초가였던 형국은 운 좋게도 '치욕의 회견' 이후 적잖이 반전됐다. 정부의 부동산 헛발질이 이어진 덕이다. '전세 대출 소득 제한 강화' 같은 어설픈 규제는 허점만 드러낸 채 하루 만에 뒤집혔고, 당·정·청은 저마다 중구난방 대책을 쏟아내는 중이다. 박 시장만이 한 발 비켜선 모양새다. 시 관계자는 "잘못을 인정하고 빨리 털고 간 게 운신 폭을 넓혔다"고 말했다. 뒤늦게 공급 기조로 돌아선 정부와 여당이 서울 그린벨트 해제를 압박해도 "미래 세대를 위한 최후 보루"라고 큰 소리 한 번은 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이 기세가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다. 용산 미군기지 터에 아파트를 지어달라는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온 판이다. 박 시장을 쭉 흔들어온 '엇박자론'의 위력도 엄연하다. '박원순이 협조 안 해서 집값이 올랐다'고 또 한 번 독박을 뒤집어 씌울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정부와 보조를 맞춰 공연히 그린벨트까지 손을 댔다간 '개발주의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토지 보상금으로 풀린 돈은 과거에 그랬듯 또다시 집값을 들썩이게 할 것이다. 집 없는 서민들이 이미 정부 부동산 정책에 신뢰를 거둔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뭘 해보지도 못 하고 끌려만 다니다 함께 침몰하는 경우가 차기 대권 주자로서 최악이다. 박 시장으로선 이래저래 고민만 늘었다.     

노동규 기자laborsta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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