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2035] '아가씨'라 부르지 마세요

김경희 입력 2018. 9. 19. 00:22 수정 2018. 9. 19.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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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정치팀 기자
결혼 후 첫 명절을 맞는 내 친구에겐 고민이 하나 있다. 추석 때 온 가족이 집에 모일텐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편의 남동생에게 ‘도련님’이라고 하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아서다. 양가 부모님 책장에 ‘며느라기’ 웹툰 책을 잘 보이게 꽂아두는 당돌한 부부다. 남편과는 동생의 이름에 님자를 붙여 부르기로 합의했다. 다만 친척 어르신들에게 일일이 이유를 설명하는 게 고역이다.

또 다른 친구는 아예 호칭을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굳이 부르지 않고 가까이서 말을 거는 식이다. 남편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아가씨’이고 그 여동생의 남편 혹은 결혼한 남동생은 또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2011년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표준언어예절’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런데 모르면 몰랐을까 뜻을 알고 나선 좀처럼 이 단어들이 입에 붙지 않는 게 당연하다.

아가씨나 도련님은 조선시대 하인이 양반집 자제들을 높여 부르던 호칭이다. 아가씨는 요즘도 미혼 여성을 일컫는 말이지 않으냐고 반문한다면, 남편의 여동생이 결혼했어도 아가씨라 부르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건지 궁금하다. 서방님은 ‘글방’에 계시는 분, 도련님은 학문을 닦는 인재 중 으뜸을 뜻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즘 감수성에는 통 맞지 않는다.

지난해 국립국어원이 전국의 10~60대 남녀 4000명에게 물었더니 ‘도련님’ ‘아가씨’ 등의 호칭을 개선해야 한다는 응답이 65.8%에 달했다. 개선 방안으로는 남편 쪽이든 아내 쪽이든 그냥 이름을 부르자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 00씨, 동생 등이 뒤를 이었다. 차라리 미국처럼 거추장스러운 호칭들 없애고 이름을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8월 말 이런 성차별적 가족 호칭을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뭔가 기대해도 되는 걸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가 그 대상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너무 오랜 세월 관행으로 굳어져서 대체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반응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무책임하다. 여가부가 뒤늦게나마 총대를 메기로 했으니 욕을 먹더라도 성과를 내주기 바란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문제의식을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2006년 한국여성민우회가 호칭 개선 캠페인을 벌였지만 무관심 속에 묻혔다고 하는데, 나도 그해 대학에 입학했다. 중요한건 이제부터라도 바로잡으려는 의지다.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말이다. 우선 사촌오빠와 결혼한 언니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한다. “앞으로는 아가씨라 부르지 마세요.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김경희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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