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박보균 칼럼] 이재용의 평양

박보균 2018. 9. 2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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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집단 행위예술의 무대
'우리 민족끼리' 상징 쏟아내
그 속에서 어이없는 장면은
북한 부총리의 재계 집단면담
이재용의 평양은 삼중 압박
'뉴델리·하노이 이재용'과 달라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평양은 잔치다. 남북 정상회담의 색감은 선명하다. 환영 인파의 꽃술과 한복은 붉게 퍼졌다. 출발의 풍광은 낯익다. 2000년, 2007년 정상회담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로움과 파격을 넣었다. 순안공항 예포, 남북 정상의 무개차 퍼레이드는 처음이다.

평양의 집단 행위예술은 진화했다. 북한의 이미지는 ‘시네마 국가’다. ‘5·1경기장’의 집단체조는 그것의 집중이다. 극장식 주민 동원체제는 북한 통치술의 기묘함이다. 그 속의 극적 장치들이 가동됐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의전과 영접에 투입됐다. 그것으로 ‘우리 민족끼리’의 상징물이 쏟아진다. 남북 정상의 백두산 등정은 그것의 절정이 될 것이다.

‘평양 선언문’은 압축적이다. 문 대통령은 단언했다.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선언문에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들어 있다. 그 예고는 감성의 소비를 유발한다. 젊은 영도자는 어휘를 엄선한 듯하다. “새로운 희망으로 높뛰는 민족의 숨결이 있고….” 김 위원장의 발언들 중 최고의 수사(修辭)는 솔직함이다. 그가 백화원 영빈관에서 한 말이다.

“발전된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 숙소라는 것이 초라하죠.” 초라함의 단어 선택은 기습 효과를 갖는다. 그것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과 차별화된다. 김정일은 통 큰 유머감각을 보였다. 하지만 김정일의 어휘에는 인민공화국의 초라함은 없었다.

평양의 장면은 동시다발적이다. 어색하고 어이없는 장면들도 있다. 이용남(리룡남) 북한 내각부총리와 남한 기업인들의 집단 면담이다. 그 자리에 대기업 총수들이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이다. 17명의 기업인들은 한마디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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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부회장은 시각적 인연을 찾는 듯했다. “평양역 건너편에 새로 지은 건물에 ‘과학중심 인재중심’이라고 쓰여 있었다…. 삼성의 기본경영 철학이 기술중심 인재중심”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용남은 “이재용 선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던데”라고 했다. 여러 곳에서 웃음이 나왔다. 이용남은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서도 유명한 인물이 되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말 속에 ‘여러 측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재용의 재판을 빗댄 것일까. 지난해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239조원이다. 북한 국내총생산(GDP)은 30조원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8배 많다. 이용남은 그런 빈곤 경제의 실무 지휘자다. 그의 권력 서열은 한참 밀린다. 그런 그가 글로벌 기업인들을 소집한 듯했다. 말투는 훈수를 두는 듯했다. 그 장면은 인도의 모디 총리를 떠올린다. 모디는 이재용을 단독 만남으로 예우한다. 베트남의 권력 서열 1위(응우옌 푸 쫑 당서기장)도 이재용을 찾았다(2014년 10월). 그들 지도자들의 진정성은 뚜렷했다. 삼성의 투자를 요청했다. 그 뒤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대비의 순간 ‘이재용의 평양’은 우울하게 전파된다. 그것은 ‘이재용의 뉴델리, 하노이’와는 딴판이다. 그의 평양행은 어떻게 이뤄졌나. 청와대는 “우리 정부 요청”이라고 했다. 북측 관계자는 “우리가 꼭 오시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미국은 재계 총수들을 대북제재 시각에서 살핀다. ‘이재용의 평양’은 삼중의 압박이다.

집단 면담 자리는 더욱 한심해진다. 오영식 한국철도공사 사장의 차례에서다. 이용남은 “북남관계에서 철도협력이 제일 중요하고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년에 몇 번씩 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오영식은 남북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이용남의 어휘는 남쪽에 거들먹거림으로 투영된다. 북한의 철도는 낡았다. 속도는 평균 20~35㎞로 알려졌다. 그 느려터짐은 마라토너 이봉주(최고시속 20㎞)와 비교하면 실감난다. 북한 열차 속력은 일제 강점기보다 후퇴했다. 그 시절 열차는 부산~경성(서울)~신의주를 거쳐 만주국 봉천(현재 중국 선양)으로 갔다. 그 노선은 시속 50~70㎞였다.

문 대통령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의지를 표시했다. 우선적 사업은 남북 철도 연결이다. 민족은 감성적 열정이다. 경제는 냉정하다. 협력의 시작은 철도 현황의 성실한 설명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그들은 김 위원장의 진솔함과 비교된다. “평창올림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 … 북에 오면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4·27 판문점 회담)

경제개발은 난제다. 핵무장보다 힘들다. 중국은 실사구시로 접근했다. 베트남의 도이머이는 민생의 성실한 공개로 확장했다. 이용남의 언행은 대다수 한국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로 인해 대북 퍼주기의 의심이 커졌다. 북한의 ‘이재용의 평양’ 구성은 어설펐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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