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은 왜왕 국서 때문?

임기환 입력 2018. 9. 2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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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54]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집착한 이유나 배경은 복합적이다. 그 거대한 규모의 군사 동원이나 왕조가 멸망할 정도로 국운을 걸고 벌이는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는 의당 다양한 요소들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돌궐과의 연결을 꾀하며 수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외교 전략이 수양제와 그의 신하들에게 고구려 정벌의 동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사실 고구려 원정의 뜻을 수양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품고 있었지만, 607년 돌궐 땅에서 고구려 사신을 마주침으로 인해 결심이 더 굳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607년 말에 왜왕이 보낸 사신이 수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사신이 내민 왜왕의 국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노라(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이 국서를 본 수양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감히 동쪽 궁벽진 곳에 있어 눈길조차 주지 않던 왜왕 주제에 감히 천자를 칭하다니. 아마도 수양제는 왜의 배후에 고구려가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일본 땅이 해 뜨는 곳이고, 수나라 땅이 해 지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역은 바로 왜와 수의 중간에 위치한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구려는 수와의 대결을 앞두고 배후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영양왕대부터 왜와의 인적·물적 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했다. 특히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던 고구려승 혜자(慧慈)는 595년부터 20년간 왜에서 활동하면서 고구려의 대왜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고구려가 왜와 교섭을 추진한 결과, 앞서 언급한 왜왕의 국서(國書)가 수에 보내지게 됐던 것이다. 이 국서 사건은 왜를 통해 수의 동향을 떠보려고 하였던 고구려 외교 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왜왕의 국서를 받은 수양제의 분노를 생각하면 왜국 사신단 일행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터인데도, 수양제는 화를 꾹 참고 왜 사신단에 수의 사신을 함께 파견하였다. 아마도 왜국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파악하고, 그 배후에 고구려가 있다면 이를 견제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607년 동돌궐 땅에서 고구려 사신을 마주친 뒤, 그해 말에 또다시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왜왕의 국서가 도착하자, 수양제는 고구려의 외교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돼 고구려 원정을 서둘렀다.

지금까지 주로 고구려와 수 사이에 벌어지는 외교전략 차원에서 전쟁의 동기와 배경을 짚어보았다. 이제 수의 내부 사정과 관련된 요인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수양제를 둘러싼 수 관료집단의 갈등도 고려할 요인이다. 양현감의 반란도 이러한 갈등의 결과라 할 수 있겠는데, 특히 양제의 말년에는 소위(蘇威)·우문술(宇文述)·배구(裵矩)·배온(裵蘊)·우세기(虞世基) 등 소위 '5귀(五貴)'라고 불리는 자들이 수양제를 정점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들 중 배구는 당시 중국적 천하질서를 내세우는 인물이고, 우문술은 대외정복 활동에서 공을 세워 출신한 인물로, 서역의 정벌 시에도 배구(裵矩)와 같이 활약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이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대외 정벌을 추구하면서 전쟁에서 군공을 얻고자 했고, 수양제로 하여금 무모하리만큼 고구려 정벌을 감행하도록 했다.

우문술(宇文述) 묘지명 : 수양제의 최측근 인물로서 고구려와 전쟁의 주역이었다. 묘지명은 2006년 중국 섬서성 함양시 경양현(涇陽縣)에서 출토되었다. / 사진=바이두

그리고 수가 중국 중심 천하질서의 확대를 내세우며 대외 팽창을 적극 추진하는 배경에는 경제적 요인도 어느 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돌궐을 순행하고 있던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을 마주쳤을 때, 수양제에게 고구려의 정벌을 적극 권고한 인물이 배구였다. 그는 일찌기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서역에 파견되었던 인물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역도기(西域圖記)'를 저술하고 이를 양제에게 올려 서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었다. 그 결과 수의 서역 진출이 급속히 추진됐던 것이다.

그가 중화의식에 바탕을 둔 대의명분론을 내세우고 고구려 땅이 본래 한의 군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였던 데에는 서역과의 무역에서 얻은 경험도 일면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 왕조 초기 영주총관 위예가 북방 민족과의 교역을 통해 크게 치부하였던 점은 수의 동북방으로의 진출에 경제적 요인도 자리 잡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낙양과 탁군을 잇는 영제거(永濟渠)라는 대운하의 축조도 이러한 측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양한 요인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양제 자신에게 있다고 보인다. 사실 그의 황제 즉위가 불법적인 찬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정통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었다. 수 문제는 장자 양용(楊勇)를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차자인 양광(楊廣 : 수양제)을 황태자로 올렸다. 그만큼 문제와 독고황후는 양광을 총애했다. 그런데 양광이 황태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그의 형제들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명분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두려워하던 독고황후가 죽고, 이어서 문제가 병석에 누운 뒤 곧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수양제는 부왕의 의심스러운 죽음에 대한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같은 정통성의 미비를 수양제는 끊임없는 대외정벌을 통해 만회하려고 했고, 그것이 고구려 원정으로 나타났다는 견해도 귀기울여볼 만하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원정을 수양제의 집권력 강화와 관련하여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수왕조의 권력 기반은 수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關中) 지역이었다. 그런데 문제 대에는 물론 양제의 즉위 초에도 관중 지역 귀족세력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양제는 낙양으로 천도했으며,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충성을 신뢰할 수 없는 관중 출신의 장수와 훈신귀족들을 하나의 명분 아래 집결시켜 기강 단속을 도모하기 위해 대외정벌을 지속했다. 그 정점이 고구려 원정이었다. 즉 불완전한 집권화 국면을 타개하고 절대 황제권을 실현하려는 의도에서 고구려 원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황제의 절대적 권위에 집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3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중원을 통일한 대제국을 지배하는 황제 권력을 실현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수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국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문제 때만 해도 고구려에게 칭신(稱臣)을 요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돌궐을 굴복시키고, 서역을 복속시킨 양제 때에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 보다 현실성을 띠고 확대됐다. 고구려 정벌 시에 내린 수양제의 조서에서는 고구려의 실정(失政)을 꾸짖으며 백성들의 위무를 천명하고 있다. 즉 황제 지배체제의 확대를 추구한 것이다. 세 차례의 고구려 정벌이 수양제의 친정(親征)으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런 수양제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결국 왕조의 멸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에는 여러 원인과 동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수양제 자신의 욕망과 전쟁 의지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역사상 많은 전쟁이 그렇지만, 결코 필연적인 전쟁은 없다. 특히 최고 집권자의 어리석은 결정으로부터 비롯한 전쟁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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