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위기의 한복]① 고름 대신 리본 묶은 퓨전 한복, 한복이 위험하다

김은영 기자 입력 2018.09.23. 07:02 수정 2018.09.2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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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복 감별 vs 시대의 변화’ 한복 전통성 논란 고조
전통 한복 입자더니, 미니스커트 한복 패션쇼…중구난방 한복 정책, 혼란 가중

21일 경복궁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퓨전 한복을 입고 있다./김은영 기자

서울 종로구청은 지난 11일 한복 토론회를 열고, 전통 한복이 아닌 퓨전 한복 착용자에게 고궁 무료입장 등의 혜택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국적 불명의 퓨전 한복이 한복의 전통성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짧은 기장의 한복과 고름 대신 리본을 묶은 한복을 퓨전 한복의 예로 들었다.

일주일 뒤인 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는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한 ‘궁나들이’ 패션쇼가 열렸다. 청년들의 창업 장려와 한복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로, 서울 지역 패션학과 대학생 100여 명이 현대적인 한복을 내놨다. 여기엔 종로구청이 전통성 훼손의 사례로 든 미니스커트 한복과 리본 한복 등도 포함됐다.

한 시민은 "얼마 전에는 전통 한복을 입자더니, 이젠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한복을 입고 궁에 가자고 한다"며 의아해했다. 한복을 둘러싸고 종로구청과 서울시는 왜 상반된 입장을 보인 걸까?

◇ 고름 대신 리본, 한복이 훼손되고 있다

21일 경복궁을 찾았다. 궁에 들어서기 전부터 색색의 한복을 입고 무리 지어 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눈길을 끈다. 화려한 무늬의 치마 안에 서양식 드레스에 들어가는 페티코트(Petticoat·치마 안에 받쳐 입는 빳빳한 속치마)를 입어 한껏 부풀리고, 위로는 고름이 없는 짧은 저고리를 입어 상박하후(上薄下厚) 실루엣을 강조했다. 치마 위로는 금박 문양의 끈으로 리본을 묶었다. 얼핏 보기엔 한복 같지만, 엄밀히 말해 전통 한복과 거리가 멀다.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박모 씨(23)는 "한복을 입고 예쁜 사진을 남기려고 놀러 왔다"면서 "사진발을 잘 받기 위해 화려한 색상과 문양이 들어간 퓨전 한복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날 박 씨 일행은 한복을 입은 덕에 입장료(3000원)를 내지 않고 경복궁을 관람했다.

17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궁나들이’ 패션쇼./서울디자인재단 제공

문화재청 '한복 무료 관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전통 한복과 생활 한복을 입은 사람은 궁궐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여기서 고름이나 매듭 방식 등은 구분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종로구청은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구청 관계자는 "개량 한복을 고궁 무료입장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문화재청에 요청할 계획"이라며, 10월부터 종로구 음식점 116곳에서 한복 착용자에게 주던 10% 할인 혜택에서 개량 한복 착용자를 제외한다고 했다. 이에 문화재청 측은 "한복을 제대로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이를 좋아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며 곤혹스러운 입장을 드러냈다.

◇ 체험 한복 문화와 함께 변질된 전통 한복

퓨전 한복이 등장한 것은 문화재청이 ‘한복 무료 관람’을 시행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전주에 한복 체험 대여점이 설립됐고, 이후 전국 고궁을 중심으로 체험 한복 업체가 급증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복을 입고 SNS에 인증하는 문화가 퍼진 것도 이 무렵. 지난해 한복을 입고 고궁을 찾은 사람은 63만 명에 달한다.

이 제도는 한복 활성화라는 성과를 냈지만, 동시에 퓨전 한복을 양산했다. 한복진흥센터 관계자는 "2~3년 전만 해도 이렇게 변형되지 않았다. 시장이 포화되고, 소비자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찾으면서 점점 화려하고 과감해졌다"라고 했다.

한복진흥센터 조사에 따르면 체험 한복을 대여하는 연령은 20대가 과반수(55.2%)로, 70% 이상이 퓨전 한복을 선호했다. 반면, 한복 체험을 하는 외국인은 전통 한복을 선호했다. 또 한복 체험한 이 중 내국인의 89%, 외국인 92.5%가 만족한다고 밝혔다.

경복궁 인근의 체험 한복 매장, 주로 퓨전 한복을 전시하고 대여해 준다./김은영 기자

체험 한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가장 큰 쟁점은 ‘무엇이 전통이냐’는 것. "전통 복식을 고증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모두 전통 한복이 아니다"라는 입장부터, "1970~80년대에 입은 근대 한복이 전통 한복"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변질된 체험 한복으로 인해 한복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확산되고 전통 한복의 맥이 끊길 것을 우려한다.

일각에선 "그냥 놀이로 봐달라"는 말도 나온다. 직장인 김대현 씨(40)는 "쌀밥에 김치만 한식이고, 짜장면은 한식이 아니라는 말과 같지 않나?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전통도 유연하게 변해야 한다"고 했다. 생활한복 업체 리슬의 황이슬 대표(31)는 "겨우 한복 입기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이런 논란으로 인해 그나마 타오른 불씨가 꺼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한복, 진위 논란 앞서 전통 한복 ‘경험치’ 높여야

체험 한복 업체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 한복 체험 사업을 하라고 지원금을 주며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전통성을 운운하며 목을 조르려 한다"며 일관성 없는 정책을 비난했다. 종로구청의 ‘한복 감별’ 논쟁과 서울디자인재단의 ‘신한복 패션쇼’가 비슷한 시기에 열린 이유도 한복을 그저 이벤트용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

2015년 12월 전주 한옥마을에서 한복 체험을 즐기는 관광객들. 전통한복을 입은 모습이다./조선DB

종로구청 한복 토론회에 참석한 이혜순 한복 디자이너는 전통성 논란에 앞서 한복을 제대로 아는 기관이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나눠준 브로슈어를 보니 대님 치는 법이 틀렸더라. 문제의식을 갖는 건 좋지만, 이를 주장하는 주최 측이 한복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한복은 시대에 따라 변형되고, 진화해야 한다. 하지만 정체성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변형이 아니라 훼손이다. 음식점 위생 교육처럼, 체험 한복 업체들이 제대로 된 한복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도록 교육해서 올바른 한복 문화가 퍼지도록 하자"고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