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정상가족'과 '위기가족'만 있다"

글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2018. 9. 23. 10: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올해 초 영국은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 장관은 ‘외로움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김순남 성공회대학교 젠더센터 연구교수이자 가족구성권연구소(준) 대표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가치를 중심에 둬야만 ‘정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준) 대표가 9월 11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김 대표는 한국에는 ‘정상가족’과 ‘위기가족’만 있다고 지적했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부부의 출산 혹은 입양이 아니면 모두 ‘위기가족’에 해당된다. 김 대표는 제도가 현실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어떤 형태만을 가족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가족의 주요한 기능을 중심에 두고 가족을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를 9월 11일 만났다.

-가족구성권연구소(준)는 어떤 곳인가. “연구소는 가족구성원 연구모임을 기반으로 한다. 2005년에 호주제가 폐지되고 2006년 연구모임이 시작됐다. 한국은 가족이 아니라 ‘가족주의’가 공고한 사회다. 가족주의는 가족끼리 잘살자는 문화가 아니다. 가부장제와 이성애 이데올로기가 가족주의의 바탕이다. 거기에 일차적인 균열을 낸 게 호주제 폐지다. 호주제 폐지 이후, 다양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여성학, 사회복지학, 인권변호사, 활동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결합해서 연구모임이 꾸려졌다.”

-가족주의가 강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간단하게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개개의 구성원보다 중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족 내의 인권, 성평등,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논하기 어렵다. 딸이라서 차별받고 장애인이라서 집에 가둬두는 것 등의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다. 가족주의가 강한 문화일수록 친족폭력이 많다. 가족관계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가족 내의 각 개인들이 평등해야 한다.”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호주제 폐지 이후 비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성소수자 이슈가 활성화됐다.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2005년 제정된 건강가족기본법이 대표적이다. 건강가족기본법은 ‘정상가족’을 이성애에 기반한 배우자, 출산, 입양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형태만 ‘건강한 가족’으로 보고 나머지는 위기가족, 보호가족으로 본다. 이걸 평등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제도의 한계는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이성애 배우자, 출산, 입양의 범주 밖에 있는 가족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일상적이다. 육아휴직을 예로 들어보자. 부모가 있는 아이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보다 두 배의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육아휴직 수당도 마찬가지다. 맞벌이 육아휴직 모델을 기준으로 육아휴직 급여를 책정하기에 단독 생계부양자인 한부모 가족들은 육아휴직시에 경제적인 빈곤이나 생활에 어려움이 크다. 동성커플은 10년을 같이 살아도 병원에서 보호자가 될 수 없다. 휴대전화 가족 할인의 경우, 소비자의 사용패턴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관계형태에 이익을 주는 비합리적인 차별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법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일차적으로는 국가 관점의 부재다. 한국의 가족정책은 ‘기능’에 주목한다. 기능을 행하는 가족형태만 제도에 들어갈 수 있고 혜택을 준다. 이런 기능적 관점은 성평등에 어긋날 뿐 아니라 생산적인 인구와 비생산적인 인구를 차별한다. 생산적인 인구라고 하면 이성애, 비장애인이다. 국가의 역할은 정상모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개인이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를 지원하는 것이다. 관점을 기능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준) 대표가 9월 11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실천’의 관점에서 가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가족의 실천을 친밀성, 돌봄, 경제적 부양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개인들이 어떻게 이 세 가지를 실행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정상가족’의 형태를 가장 상위에 두고 나머지 가족형태에 대해 다른 지원을 할 것이 아니라 친밀성, 돌봄, 경제적 부양이라는 키워드를 상위에 놓고 어떤 형태든지 여기에 충족하면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령 1인가구를 보자. 이들은 따로 사는 부모에게 용돈을 보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돌봄도 한다. 그런데 1인가구는 가족의 형태로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왜 가족구성권에 대해 고민해야 할까. “예전에는 생애주기라는 단어를 썼다. 예비부부, 결혼, 부모, 조부모 이런 식으로 인생을 예측 가능한 모델로 두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생애과정에 따라 가족의 형태는 계속 변화한다. 다양한 관계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삶의 반경도 넓어진다. 지금은 여성이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 가정폭력이 발생해도 아이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한부모 가정이 차별받지 않고 충분히 지원받는다면 참고 살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동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건강가정기본법의 전면수정이 필요하다. 건강가정지원센터 안내를 보면 건강가정 상담지원, 예비부부교실, 아동기 부모교실, 남성돌봄사업이라고 되어 있다. 딱 이성애 맞벌이 모델이다. 명칭 하나하나가 다 낙인이다. 외국은 가족상담지원, 동반자 교실, 아동기 양육자교실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부모가 아니라 양육자 교실이기 때문에 비혼모인지 한부모인지 할머니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아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주거정책, 의료결정권, 공동으로 형성한 재산권 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이 생겨야 한다.”

-상당히 급진적인데 사회적인 반발은 없을까. “2000년대 초만 해도 가족구성권은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진영만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결혼, 출산, 양육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기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려보고자 하는 욕구도 크다. 가족구성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제도를 바꾸고자 하는 건 정상가족이라는 모델에 주는 혜택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개개인이 맺는 관계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글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