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여성 비하로 웃길 건가요? 불편한 개그는 사양합니다

2018. 9. 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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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진행자·스탠드업코미디언 '셀럽 맷' 인터뷰
"여성이나 소수자 비하하지 않고도 웃길 수 있는 개그하고 싶어"

[한겨레]

15일 저녁 제12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열린 ‘코리안 페미니스트들의 스탠딩코미디쇼’가 끝난 뒤 ‘셀럽 맷’을 만났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인 그는 “페미니스트라고 외치는 코미디언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다해 기자

#. 한국방송(KBS) 2TV <개그콘서트>

2015년 1월11일 방송된 <개그콘서트> ‘사둥이는 아빠딸’ 코너에서 아빠 역할을 맡은 정태호가 딸들에게 새해 목표를 묻자 딸 역할을 맡은 김승혜가 “난 꼭 김치 먹는 데 성공해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태호가 “튼튼해질 거야?”라고 물었고, 김승혜는 “김치녀가 될 거야. 오빠 나 명품백 사줘. 신상으로. 아님 신상 구두?”라며 명품백을 어깨에 거는 포즈를 취했다. 여성 혐오 표현으로 가장 흔히 쓰이는 ‘김치녀’라는 단어가 구체적인 묘사와 함께 개그 프로그램에 고스란히 등장했다.

<개그콘서트>의 시대착오적인 여성 혐오 개그는 2018년에도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9월23일 방송된 <개그콘서트> ‘러브라더’ 코너에서 연애 세포가 결혼 세포가 된 남자 콘셉트로 등장한 박영진은 “저는 지금도 아내만 보면 떨린다. 치가 떨린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제가 결혼 전에는 선생님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지금 선생님 같은 예쁜 아내랑 살고 있다. 얼마나 선생님 같은지 ‘문 닫고 볼일 보랬지?’ ‘변기 커버 올리랬지?’ 도덕 선생님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맥락 없이 아내를 비하하는 박영진의 개그는 여성 혐오와 약자 비하, 외모 조롱 등으로 비판받아온 <개그콘서트> 시청률이 한때 27.9%에 달했다가 지금은 5% 이하로 떨어진 이유를 말해준다.

#. tvN <코미디빅리그>

지난 3월4일 방송된 ‘오지라퍼’ 코너에서 개그맨 이상준은 여성 방청객의 외모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을 끌어내려 했다. <코미디빅리그>는 이 밖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외모를 소재로 외모 비하를 일삼는 개그를 선보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주의를 받았다.

아울러 드라마를 패러디하며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한 대만 때려줘요”라고 여성이 말하자 남성이 주먹으로 여성의 배를 때리고, 이를 본 경찰이 “당신을 구타유발자로 체포합니다”라고 언급하는 장면도 등장했다. 또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아내의 머리를 남편이 때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다분히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을 희화화한 장면이다.

지난 15일 저녁 서울 압구정 씨지브이(CGV)에선 혐오가 넘치는 TV 속 개그 프로그램과는 다른 코미디쇼가 열렸다. 제12회 여성인권영화제의 부대 행사로 기획된 ‘코리안 페미니스트들의 스탠딩 코미디쇼’가 펼쳐진 자리였다.

“왜 여성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너무 쉽게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하죠? 여성을 ‘사랑’하거나 ‘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남성분들도 있더라고요.”

‘여성 혐오’에 대한 개념과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단지 “나는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란 이유만으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풍자였다. 객석에선 웃음이 쏟아졌다.

마이크와 입담만으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 이는 팟캐스트 <독일언니들>과 <영혼의 노숙자>를 진행하는 1인 창작자 ‘셀럽 맷’ 이지희씨다. 이씨는 한국에선 조금 생소한 ‘스탠드업 코미디’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 인물이다.

스탠딩코미디쇼가 끝난 뒤 <한겨레>와 만난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여성들이 들어도 불편해하지 않을 개그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움직이는 동력 중 하나는 기성 코미디에 대한 불편함이다.

“여성 코미디언들이 소비되는 패턴은 항상 비슷하죠. 뚱뚱하거나 못생긴 걸 오히려 ‘무기’로 삼아 활동하면서도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면 여성스러운 모습도 보여줘야 하는 게 기존의 (개그) 판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개그나 예능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여성은 오로지 남성의 관점에서 평가받는 존재로 그려져 왔다. 예쁜 여성과 못생긴 여성, 날씬한 여성과 뚱뚱한 여성, 어린 여성과 나이 든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희화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을 상대로 성적인 농담을 하거나 ‘김치녀’와 같은 여성비하 표현을 가감 없이 사용하는 식이었다.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과 같은 시민단체나 국회 등 외부에서도 비판이 반복됐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혐오와 조롱의 범위는 여성에서 성소수자로, 장애인으로, 한부모가정 아이로 점차 커졌다.

2016년 4월7일 방영된 tvN <코미디빅리그>의 코너 ‘충청도의 힘’에서 ‘애늙은이’ 캐릭터로 등장한 장동민은 친구가 장난감을 자랑하자 “쟤네 아버지가 양육비 보냈나 보네”, “선물을 양쪽에서 받잖여. 재테크여”라고 말했다. 이어 할머니로 출연한 황제성은 “너는 엄마 집으로 가냐, 아빠 집으로 가냐”, “아버지가 서울서 두 집 살림 차렸다는데”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한부모가정 비하 개그였다. 게다가 할머니가 손자의 성기를 만지는 내용 역시 아동 성추행을 희화화하는 장면으로 비판받았다. 방송 후 논란이 커지자 제작진은 사과하고 코너를 폐지했다.

이씨의 도전은 이런 혐오와 비하 개그의 대척점에서 출발한다. 그의 개그나 방송 속에선 여성이 웃고 말하는 주체가 된다. 지금까지 선 무대도 영화 <피의 연대기>와 함께한 토크쇼 ‘생리파티’, ‘여성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전면에 내건 <래프 라우더> 쇼, 그리고 여성인권영화제처럼 모두 여성과 관련된 자리였다.

그는 ‘한국에서 성욕 강한 여자로 살아남는 법’을 주제로 여성이 주체적으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문화를 꼬집는가 하면, “아내는 자신의 경력을 쌓기보다는 남편이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설문 문항을 담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출산력 조사’를 비틀어 웃음을 끌어낸다.

이씨는 “저도 (젠더·인권감수성이 떨어지는) 일반적인 티브이(TV) 콘텐츠를 (불편해서) 잘 소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저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다루는) 그런 방향으로 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에서도 가감없이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다. 이 방송에선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 여성의 외모를 정형화하는 ‘코르셋’에 대해, ‘맨박스’(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대해, 여성의 성생활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낸다.

성소수자인 게스트가 직접 출연해 대화를 나눈 방송은 가장 호응이 좋았던 회차로 꼽힌다. 무대에서 소외되거나 지워졌던 목소리를 주인공으로 불러내는 것, 공채 개그맨이나 전문 방송진행자가 아님에도 그의 팟캐스트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최근에는 청취자들이 더 늘어나 월평균 100만명을 기록했어요. 첫 번째 팟캐스트 <독일언니들> 때보다 페미니즘 이슈를 많이 다루다 보니 떠난 청취자도 있지만 그 자리를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분들이 채우더라고요. 지금은 (그런 분들이) 훨씬 많아졌고요. 팟캐스트를 계속 들으면서 자신도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삶이 많이 바뀌었다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어요. 저도 같이 성장하고 있고요.”

이씨는 여성의 삶을 이야기할 때조차 남성 패널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현실에 대해서 꼬집기도 했다. 일례로 지난 8일 방영된 한국방송(KBS) <대화의 희열>은 첫 회에서 코미디언 김숙을 초대해 남성 중심의 예능계를 비판하면서, 정작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전원 남성을 배치해 “모순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대화의 희열> 방송 뒤 관련 기사에 달린 비판적인 댓글들. 다음 갈무리

“페미니즘이 ‘핫’하다고 하니까 (방송에서도) 다루기는 하는데 그조차 남성의 목소리를 빌어서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공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너무 안이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더 많은 여성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건네줘야 한다. 이제는 ‘페미니스트’라고 앞에서 외치는 코미디언도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씨의 도전에선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했던 송은이, 김숙의 모습이 스친다. 남성 중심의 방송계에서 더이상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을 때, 남성 진행자·출연자·정치 이슈 중심의 팟캐스트 세계에서 두 여성 개그맨이 시작한 <비밀보장>은 예능계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냈다. 조롱과 비하 대신 경청과 공감을 채워 넣은 방송은 소위 ‘대박’이 났고, 이는 두 사람이 다시 방송계로 돌아와 자신만의 판을 만들고 확장해나가는 계기가 됐다. 여성이 더 이상 부차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고도 충분히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음을 두 개그맨은 증명해냈다.

이씨 역시 “여성들도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판을 꿈꾼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개그는 사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웃기는 거잖아요. 여성이나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은 쓰지 않고, 그들도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똑똑한’ 개그를 하고 싶어요. 페미니스트 코미디언으로서 여성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저도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고요.”

그는 이르면 올해 말 단독 스탠드업코미디쇼를 계획하고 있다. 오는 10월부터는 여성의 삶을 다루는 매거진 <헤이메이트> 팀과 함께 네이버 오디오클립 ‘시스터후드’를 제작할 예정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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